책소개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 1889∼1960)는 프랑스 현대시에서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보적인 목소리를 지킨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굳이 계보를 세워 본다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감각적 시어로 표현하려 한 랭보와 여백으로 드러내려 한 말라르메 사이에 그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다. 그의 시와 시론은 훗날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는 젊은 앙드레 브르통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태동에 실질적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는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초월(sur-)’이라는 방식으로 대응한 초현실주의에 휩쓸리는 대신, 황폐해진 “[감각] 현실을 끌어안[으면서]” 시 쓰기에서 참된 존재 방식을 탐색한다. 그의 시학은 1950년대 이후 본푸아(Yves Bonnefoy), 뒤 부셰(André Du Bouchet), 뒤팽(Jacques Dupin), 자코테(Philippe Jaccottet) 등 일부 시인이 감각 현실을 외면한 초현실주의에 맞서 펼친 존재론적 시학의 출현에 영향을 준다.
르베르디의 시는 감각 현실 너머로 길 트려는 의지와 그 밀도 높은 시적 형상화를 보여 준다. 그 형상화는 그의 세계 인식을 반영하며, 그 인식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내재한다. 그의 시가 표현하는 서정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 내면에 억압된 정서의 표출에 있으며, 이는 곧 무한이라는 존재 본연 회복의 꿈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감각 현실의 한계를 존재 결핍으로 체험하고 본질 된 세계, 곧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을 추구하는 시적 통찰의 한 사례에서 오늘날 현대인의 존재 결핍과 불안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만난다. 실존의 매순간이 존재 위기인 삶에서 시인은 자신을 낯선 경험으로, 늘 새로운 길로 내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물이 본래 무형임을 깨치고 형상을 허상으로 인식하는 시인에게 감각 현실의 한계에서 절감하는 존재 결핍은 존재 부정이 아닌, 존재 본연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체험된다. 이러한 인식 전환 속에서 그의 감수성은 삶의 본래 모습인 무형에서 존재 자유의 가능성을 읽어 낸다. 그 특유의 시적 형상화는 존재 결핍을 형상으로 메우려 하는 대신, 형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그의 시선을 투영한다. 이처럼 르베르디의 시는 감각 현실에 구속받는 인간 조건 속에서 존재 자유 추구와 존재 본연 회복이라는 인간의 보편 의지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참된 실재 인식이 궁극에는 삶의 영역 확장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시 창작의 길은 그에 동원되는 삶의 인식 방법과 그 표현 방식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터 가는 일이다. 시선을 스치는 덧없는 삶의 순간들을 뒤쫓아 시인이 터 나가는 그 길은 매순간 존재의 심연에 열려 있다. 르베르디의 시 쓰기는 걸음걸음 열리는 그 심연으로 추락을 무릅쓰는 길트기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시련인 동시에 “길 없는 순수한 환희”일 수 있다. 그것이 열어 가는 길은 이름 붙지 않은 길, 이름 붙일 수 없는 길이라는 점에서, 노자의 도(道)를 연상케 한다. 그 길은 유한과 무한을, 감각과 정신을 아우르며 인간을 절대 근원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노자가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를 가리켜 “구체적인 형체가 없고, 어디에 매여 있지 않는 [그] 모습을 찬탄”하기 위해 쓴 “황홀(恍惚)”이란 수식이 어울린다.
200자평
피에르 르베르디의 시와 시학은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태동에 실질적 동기를 부여했으며, 한편으로는 초현실주의에 맞서 일어난 존재론적 시학의 출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황폐해진 감각 현실을 끌어안으면서 시 쓰기에서 참된 존재 방식을 탐색한다. 감각 현실의 한계를 존재 결핍으로 체험하고 본질 된 세계, 곧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을 추구하는 그의 시적 통찰을 통해 오늘날 현대인의 존재 결핍과 불안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지은이
1889년 9월 11일 프랑스 남부 나르본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 호적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부모의 아이로 기록되었다. 사실혼 관계에 있던 그의 부모가 비로소 법적으로 정식 부부가 되는 1897년까지, 어린 르베르디는 포도 농장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글을 익히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일찍부터 신앙심을 갖게 되고 훗날 수도원 부근 외진 곳으로 은둔하게 된 것은 교회 석공업과 조각에 조예 깊었던 친가 쪽의 영향도 적잖았으리라 본다. 나르본과 툴루즈에서 학업을 마친 그가 1910년 가을에 고향을 떠나 작가의 길을 걷겠다고 파리로 올라올 때 그를 누구보다 격려한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당시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던 몽마르트르 언덕에 자리를 잡은 젊은 르베르디는 인쇄 교정 등 여러 일을 가리지 않고 궁핍한 생활을 꾸리면서 시 쓰기에 몰두한다. ≪타원형 천창≫(1916)에 실린 <그 시절 석탄은…>에서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가 화가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와 친분을 맺고 시인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루이 아라공, 앙드레 브르통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다다와 초현실주의 계열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그는 1917년 3월 15일에 전위 예술 잡지 ≪북ᐨ남(Nord-Sud)≫을 창간해 1918년 말까지 전위 예술을 옹호하는 예술가들에게 지면을 제공하고 자신의 시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와 남쪽 몽파르나스를 잇는 지하철 노선의 두 종착역을 뜻하는 잡지명은 당시 ‘창작의 두 거점’이었던 두 곳을 상징적으로 연결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보여 준다고 앙드레 브르통이 밝힌 바 있다. 르베르디가 그의 <이미지론(L’image)>을 처음 발표한 것도 이 잡지의 제13호(1918)에서다.
얼핏 무관해 보이는 두 현실을 가까이 둠으로써 감각 현실 이면에 은폐된 사물의 본질에, 실재에, 곧 참된 삶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는 그의 ‘이미지론’은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무의식의 흐름을 타는 자동기술법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로 현실을 부정하고 초월하려 했다면, 르베르디는 이미지가 ‘정신의 창조’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게 빚어진 절제된 이미지는, 현실을 넘어서고 잊게 하는 환상이 아니라, ‘삶의 참맛’을 되찾아 가게 할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프랑스 현대시에 시적 사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그였지만, 당시 시 문학계의 조명을 받은 이는 정작 그의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 시인 엘뤼아르와 아라공이었고, 르베르디는 그 무렵부터 중앙 문학계와 점차 거리를 둔다.
서른일곱 되던 1926년에 천주교로 개종한 그는 “자유로운 사색가, 자유로이 신을 선택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프랑스 남부 솔렘 수도원 부근에 자리 잡는다. 훗날 신앙심을 내려놓은 뒤에도 그는 세상을 뜰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은둔지에서 유럽을 혼돈에 몰아넣은 2차 대전을 겪은 그는, 저항 운동을 하거나 참여시를 쓰는 대신, “침묵과 협정을 맺었다”고 말하고 절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작품 활동을 이어 갔지만, 기꺼이 은둔의 삶을 택하고 시를 써 나간 그의 온 삶은 침묵을 그림자 삼아 나아간 여정이었다.
옮긴이
정선아는 이화여자대학교 외국어교육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랭보 연구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이후 프랑스 현대시와 한국 현대시에 관심을 두고 ‘현대시에 나타난 풍경의 서정성’, ‘프랑스와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해체 양상과 서정에 대한 반성’, ‘예술 창조와 정조 : 현대시에 대한 심미적 반성과 성찰’, ‘언어 예술의 투명성과 불투명성 : 예술 사회학적 관점에서’와 같은 연구 주제를 중심으로 다수 논문을 저술했다. 주요 논문으로 <Création d’art verbal et affect 언어 예술 창조와 정조>, <Création de l’art verbal et expérience du sublime 언어 예술 창조와 숭고의 경험>, <정조(情調)의 시적 형상화−예술 사회학적 고찰>, <언어 예술의 해석과 수용>, <색채와 정조>, <신성의 체험과 색채 표현>, <해체 시대의 서정>, <글쓰기 풍경의 탈ᐨ형상화>, <풍경의 서정>, <서정의 복귀와 반서정−1980년대 이후 프랑스 시의 동향>, 프랑스 축어시와 조연호, 신해욱의 시를 다룬 <해체의 양상으로서 여백>, 송재학과 허만하의 시를 다룬 <Creuser le paysage-mémoire 기억ᐨ풍경 파헤치기>, 앙드레 뒤 부셰의 시를 다룬 <fraîchir non finir 간격의 섬광과 존재의 해명> 등이 있다. 역서로는 ≪현대시와 지평 구조≫(2003), ≪어떤 푸른 이야기≫(2005)가 있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대부분의 시간
≪산문시≫
늘 홀로
나그네와 그의 그림자
보잘것없는 행색
아름다운 별
저마다 제 몫을
뒤집힌 이면
삶의 참맛
≪몇 편의 시≫
오
지평선
≪타원형 천창≫
(그 시절 석탄은)
(다락방 구석구석에서)
봄의 허무
시간의 너울
(등불이 아직)
걷고 또 걷기
고된 삶
(하루 첫새벽에 나는)
완전한 몰락
또 다른 하늘에서
(한번 눈을 뜨면)
서로 가슴을 열고
(그 겨울은 나를)
늘 여기에
(햇살 한 자락)
심장 종
낯선 세계 속에서
≪지붕의 석판들≫
지붕의 석판 위에
길
문턱에서
이튿날
공기
뇌우
비밀
분(分)
떠돌이
방파제
태양
맞은편
별 밝은 하늘
거리
네거리
유성
어두운
오솔길
두 세계 사이에서
시간이 되기 전에
≪채색된 별들≫
해묵은 항구들
파도 소리
일손
≪위대한 자연≫
그 추억
≪튀어 오르는 공≫
끝장난 남자
시간이 흐른다
말
만져 볼 수 없는 현실
≪바람의 근원≫
메마른 날씨
얼마나 변하는가
시 작품
수평 그것이 모든 걸 말한다
신호들
끝없는 여행들
여행
≪흰 돌들≫
기억
낯선 눈길
하얀 가면
나누는 말
들판에서 들판으로
사실상
어떤 현존
마지막에 움직이는 자
늘 똑같은 이
≪고철≫
돌아서는 마음
다정
지평을 들이켜는 자들
≪잔 가득≫
마침내
≪주검들의 노래≫
잃어버린 길−활주로
감옥
가늠할 길 없는 저 너머
≪건선거(乾船渠)≫
출발
≪초록 숲≫
안전장치
이 사막에서
≪유리 웅덩이들≫
영혼의 불멸성 그 적막한 여백들
≪유리 웅덩이들≫ 1929년 판본에 덧붙이는 시인의 말
≪천장의 햇살≫
형상
전등
괘종시계
≪바다의 자유≫
바다의 자유
숨결
낱말의 행복
정신은 바깥에
그림자의 이름
≪일렁이는 모래≫
≪되찾은 시 작품들≫
삶의 늦자락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말
빛 꺼지면, 너는 밤의 어둠 앞에 홀로 남는다. 그러면 너를 환히 밝히는 것은 너의 열린 두 눈.
뜨락에서, 네가 듣지 못하는 소리들이 올라온다. 나뭇잎들과 가지들의 갈색 반점에서, 물이 아침까지 흐른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꾼다. 그러면, 불쑥, 너는 창문을 틀 삼은 하얀 초상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도 지나가지 않고 지켜보지 않는다. 바람조차 나무들을 흔들러 불어오지 않는다, 상처 받은 네 정신이 추스르고 일어나 맴도는 이 정체(停滯)와 이 침묵에 활기를 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