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모리 오가이의 단편소설 다섯 편, 즉 1890년 발표된 일본 근대 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 <무희(舞姬)>, 같은 해에 발표된 <마리 이야기>, 이듬해에 발표된 <아씨의 편지>, 1915년 발표된 <인신매매 산쇼 다유>와 <최후의 한마디>를 묶은 것이다.
작가 오가이(鷗外)는 19세에 도쿄대학 의학부를 최연소로 졸업하고 육군에 들어가 군의(軍醫)가 된다. 그 후 22세에 독일 유학을 떠나 위생학 공부를 하고, 26세 때인 1888년에 귀국, 군의로서 업무를 계속하는 한편 다채로운 문학 활동을 벌인다. 초기 삼부작(三部作)이라고 불리는 <무희(舞姬)>, <마리 이야기>, <아씨의 편지>는 바로 이때의 작품으로 독일이 안겨준 선물이라고도 칭해진다. 이 세 작품은 독일 생활에 젖어가는 일본인 청년들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話者)로 등장하지만 내용의 중심인물은 모두 아리땁고 조숙한 소녀들이다. 19세기 말의 고풍스러운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들 작품에는 당시의 독일 소녀들이 갖고 있던 순수하고 애틋한 정서가 담겨 있어, 독특한 색깔의 낭만적 분위기에 잠기게도 한다. 오가이는 이 세 작품으로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일본 문단에 낭만주의를 불어넣는 데도 큰 몫을 했다.
삼부작이 오가이가 20대에 쓴 것인 반면, <인신매매 산쇼 다유>는 작가의 나이 53세 때 작품이다. 삼부작과 마찬가지로 <인신매매 산쇼 다유>와 <최후의 한마디>도 역시 어린 소녀들이 이야기의 핵심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다. 앞의 작품이 독일이 무대였던 것과는 달리, <인신매매 산쇼 다유>는 그 배경이 헤이안 시대(794∼1192)고, <최후의 한마디>는 에도 시대(1603∼1867)다. <인신매매 산쇼 다유>는 안주가 어머니, 남동생, 하녀와 함께 쓰쿠시로 간 후 소식이 끊어진 아버지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인신매매꾼에 속아 어머니와 헤어지고 동생과 함께 산쇼 다유의 저택으로 끌려와 노비가 되어 지내게 되는 이야기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이 책에 실린 오가이의 다섯 작품은 모두 스무 살 미만의 어린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녀들은 나이는 어리지만 자아가 투철하다. 귀족인 이다 아가씨는 물론이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가련한 소녀들도 비굴한 데가 없이 고결하고 당당하다. 여리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줄 아는 판단력과 함께 자기주장을 행동으로 옮기는 개성이 돋보인다. 오가이와 나란히 언급되면서 늘 비교가 되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여주인공들이 대부분 단조롭고 수동적인 것에 비해 오가이의 그녀들은 생동감이 넘치며 능동적인 것도 흥미롭다.
오가이는 남성들이 지배했던 사회의 모순이나 부당한 권위 등을 현명한 여성을 그려내어 고발하고 있는가 하면, <마리 이야기>에서 보듯이, 국왕의 횡사에는 신문이나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떠들어대지만 같은 시각에 죽은 불쌍한 소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는 이가 없었다”라고 꼬집기도 한다. 이들 작품이 오늘의 독자에게도 고전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기를 원하면서, 천재이면서도 성실한 오가이를 길러냈던 어린 날의 교양 있는 할머니와 대단히 다부졌던 어머니의 애정과 교육이 그의 여성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모리 오가이의 초기 삼부작이라고 불리는 ‘무희(舞姬)’, ‘마리 이야기’, ‘아씨의 편지’와 함께 ‘인신매매 산쇼 다유’, ‘최후의 한마디’를 소개한다. 이 다섯 작품은 모두 스무 살 미만의 자아가 투철한 소녀가 주인공이다. 주인공들의 생동감이 넘치며 능동적인 모습을 통해 오가이의 긍정적인 여성관을 엿볼 수 있다.
지은이
모리 오가이는 1862년 현재의 시마네현(島根縣) 서부에 속하는, 옛 이름으로는 이와미(岩見) 지방의 쓰와노(津和野)라는 마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번주(藩主)의 시의(侍醫)였다. 장남으로 태어난 오가이의 본명은 린타로(林太郞)로서, 다른 아이들이 대부분 하는 연날리기나 팽이치기도 못 해보고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해야만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훈육으로 만 다섯 살 때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1km나 떨어진 곳에 가서 <논어>와 <맹자>를 배웠으며 여덟 살부터는 한적(漢籍)을 익히며, 아홉 살쯤부터는 아버지를 통해 의학 서적을 공부하기 위해 화란어와 영어를 배우는 등, 유·소년기부터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1872년 10살 되던 해에는 친척인 니시 아마네(西周)의 권유로 도쿄로 올라와 독일어를 배운다. 아마네는 일본 최초의 화란 유학생으로서 법률과 철학을 배워 메이지 정부에서 일했던 지식인 관료 겸 학자였다. 아마네의 집에서 5년이나 거처하며, 도쿄대학 의학부에 나이를 속여가며 입학한 오가이는 19세에 최연소로 졸업한다. 졸업 후, 육군 군의로 채용된 오가이는 1884년 스물 두 살 되는 해에 육군성(陸軍省)의 명령으로 독일에 유학하여, 위생학을 연구하는 한편 문학과 미술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공부에 열중한다. 1888년에 귀국하여 군의학교(軍醫學校) 교관이 된다. 그 이듬해부터는 번역시집 <모습(於母影)>을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문(文)과 무(武)의 두 가지 길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외국의 문학 사상이나 예술 이론을 일본에 소개함과 동시에 <파우스트>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번역하여 일본 문학자들을 자극하며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시, 소설, 평론, 미술, 단가, 번역 등 다방면에 걸쳐 지대한 공헌을 한 오가이는 일본 근대문학의 제일인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의학계에도 신풍을 일으키는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무(武)의 길에서도 육군군의학교 교장을 거쳐 군의총감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그는 1916년 35년간의 군의 생활을 마치고, 여생은 제실박물관총장(帝室博物館總長), 제국미술원장(帝國美術院長) 등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1922년 이승을 떠날 때, 일체의 세간의 명예나 칭호를 거부하며 ‘나는 이와미 태생 모리 린타로로서 죽으려 한다’고 친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도쿄도 미타카(東京都三鷹) 선림사(禪林寺)에 있는 오가이의 유택(幽宅)에는 간단히 ‘모리 린타로 묘(森林太郞墓)’라고만 새겨져 있다. 모든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놓고 산뜻하게 저승으로 이사를 간 맑은 영혼이 느껴진다.
옮긴이
손순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에서 일문학을 전공하고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사생(寫生)’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메이지 시기의 일본 지식인과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1989년 도쿄대학교 객원 연구 교수를 지냈으며,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소장 및 한국 일본언어문화학회 회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일본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시가(詩歌)와 회화(繪畵)≫(중앙대학교 출판부, 1995), ≪子規の現在≫(공저, 增進會出版社, 2002), ≪조선통신사와 치요조의 하이쿠≫(한누리미디어, 2006), ≪韓流百年の日本語文學≫(공저, 人文書院, 2009)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어느 날 아침 미쳐 버리다(吉增剛造詩選集)≫(들녘, 2004), ≪모리 오가이 단편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메이지 시대의 반전시 연구> 등을 비롯한 많은 논문이 있다.
차례
무희(舞姬)
마리 이야기
아씨의 편지
인신매매 산쇼 다유
최후의 한마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렇지만 인생은 얼마 되지 않아요. 기쁘다고 생각한 순간에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으면 나중에 억울하게 생각할 날이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버렸다. 이쪽을 향해 돌아보는 얼굴은 대리석혈관에 뜨거운 피가 춤추는 것 같았고, 바람에 날리는 금발은 목을 세차게 흔들며 길게 우는 준마의 갈기를 연상케 했다. “오늘입니다. 오늘이 있을 따름이에요. 어제가 무슨 소용 있어요, 내일도 모레도 공허한 이름뿐, 부질없는 소리일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