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식민지 경제의 모순된 현실
등단작 <추석전야>는 ‘현실 폭로의 비애’가 특징이라 할 신경향파의 문학에 속하는 작품으로, 식민지 조선의 경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착취당하는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분노를 형상화하고 있다.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식민지 현실과 만나는 여성 노동자를 창조하였다는 점, 식민지 조선의 왜곡된 경제의 배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점, 그리고 금전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차원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처녀작으로 꼽고 있는 <하수도 공사>는 일보 진전된 계급의식과 투쟁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실업자 구제를 명목으로 목포에서 벌여진 실제 하수도 공사에서 소재를 취택해 일제의 조선인 착취 현실을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문제작이다. 김명순, 나혜석, 김원주 같은 1920년대 여성 작가들이 자유연애와 여성의 인권 문제를 문학작품 속에서 담론화하고 있다면, 1930년대 여성 작가 박화성은 추상적 자유연애의 대안으로 이념적 동지애를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산 생활감정’으로 빚어내는 ‘빈궁의 참맛’
1930년대 후반은 일제의 파시즘 강화로 진보적 이념이 전반적인 침체기로 들어선 시기다. 1935년 카프가 해산되었으며, 대부분의 작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세태소설과 내성(內省) 소설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박화성은 자신의 창작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모색에 들어갔다.
<홍수전후>는 계급적 각성을 한 청년 윤성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는 김 선생 등 이른바 지식인 전위라 할 수 있는 지도적 인물 유형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이들은 주인공의 의식 변화의 조력자 역할에 맞게 소설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다. 그 대신 윤성의 아버지, 봉건적 세계관을 가진 소작농 명칠과 35년 만에 닥친 홍수의 재난이 서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눈에 띄는 면모는 작가가 가난한 소작농의 생활에 밀착해서 그들이 겪게 되는 자연재해의 피해를 충실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폭우와 대결하는 명칠네 가족의 눈물겨운 사투는 그들의 가난과 처참한 현실을 극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홍수에 이어 가뭄까지 겹친 <한귀>의 처참함은 극에 달해 있는데, 작가는 이것을 무지한 소작농 아내인 성섭의 처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선량한 소작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섭이 명칠과 같이 자각하지 못하는 인물 유형에 속한다면, 성섭의 처는 배운 바 없지만 치열한 현실 속에서 모순을 깨닫고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고향 없는 사람들>은 앞선 두 작품의 최종편이라 부를 수 있다. 일제강점기 토지 수탈 정책의 파행적 운영에 따라 대다수 소작농은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땅을 버리고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일용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고향 없는 사람들>의 삼룡의 가족은 그들의 팍팍한 삶을 대변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현실과 맞서려는 삼룡의 모습에는 추상적 이념으로서의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끈질긴 생존의 의지가 발하는 강한 생명력이 투영되어 있다.
1937년 ≪여성≫에 실린 <호박>을 끝으로 박화성은 한글로 소설 창작이 어려워지자 일시적인 절필에 들어갔다. 박화성의 창작은 해방과 함께 다시 시작되는데, 동반자 작가로서의 그의 문학은 <호박>으로 일단락지어진다고 볼 수 있다.
<호박>은 <고향 없는 사람들>에서 삼룡의 친구 강판옥이 고무산 시멘트 공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와 동일한 소재를 음전과 윤수 두 청춘 남녀의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로 바꾸어 명랑하게 그려내고 있다. 처절한 현실을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넘겨낼 수 있는 음전의 건강한 웃음 속에는 암울한 현실을 담담히 감당해 내려는 작가의 옹골찬 의지가 내재해 있다.
200자평
일제강점기의 빈궁을 형상화한 동반자 작가 박화성의 작품집이다. 작품들에서 근대 초기 지식인 여성으로서 그녀가 가졌던 선각자적 자의식의 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박화성은 카프가 해산된 1930년대 후반에 객관 현실의 구체적 형상화로 전망이 부재한 식민지 조선의 빈궁(貧窮)을 탁월하게 그려냄으로써 그녀 특유의 소설 미학을 제시했다.
지은이
박화성은 1925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단편 <추석전야>가 발표됨으로써 등단해 1980년대 중반까지 6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여온 여성 작가다. 그는 1930년대 강경애와 더불어 중요한 동반자 작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여성 작가 최초로 장편소설 ≪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1932년 6월부터 1933년 11월까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작품 목록은 ≪백화≫, ≪북국의 여명≫, ≪고개를 넘으면≫ 등 장편 17편을 비롯해, 단편 62편, 중편 3편, 희곡 1편, 콩트 6편, 동화 1편, 다수의 수필과 평론 등 긴 창작 기간에 걸맞게 방대하다. 2004년에는 그의 걸출한 문학적 족적이 ≪박화성 문학 전집≫(전 20권)으로 갈무리되었다.
박화성의 작품 세계는 해방을 기점으로 급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씌어진 그의 작품은 지식인 전위가 등장해 현실의 변혁에 참여하거나 무자각한 인물의 의식을 각성시킨다. 또는 현실감 있는 묘사로 빈궁의 현실을 탁월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전망이 부재한 식민지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1937년에 발표된 단편 <호박>을 끝으로 동반자 작가로서의 그의 작품 경향은 일단락 지어진다. 해방과 전쟁을 체험하며 박화성의 작가 의식은 변모를 겪게 되는데,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재개하는 1955년을 즈음해서 그의 문제의식은 여성의 억압 문제나 중산층 여성의 합리적 이성과 새로운 윤리 의식을 천착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의 서사적 전개는 당대의 사회 현실보다는 여성의 성장사에 집중되고 있다. 박화성은 한 번 결혼한 경력이 있거나 과거가 있는 여성이 미혼의 남성과 결혼하는 줄거리를 통해 순결이나 정절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소설들을 연달아 발표하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 대부분은 신문과 잡지에 연재되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는 것과 동시에 여러 평자들을 통해 그의 준열한 작가 의식이 통속적 대중화의 경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비판적 지적을 받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박화성의 여성 인물들이 보여주고 있는 강인한 의지력과 주체적 의식이다. 여성노동자의 시각에서 식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묘파한 등단작 <추석전야>의 영신을 비롯해, 자유연애를 동지애적 사랑으로 가꾸어가는 <하수도 공사>의 용희, 하층민 여성의 건강한 생활력을 보여주는 <한귀>의 성섭의 처와 <춘소>의 어머니 등 그의 초기 작품의 여성 인물들은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해방 후 작품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이어져, 복잡하게 얽힌 연애소설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몸을 내맡기는 통속적 대중소설의 여주인공들과 달리 박화성의 인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역경을 뚫고 나가는 강인한 의지력을 보여주고 있다.
엮은이
박연옥은 1971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소설)을 공부하고 있으며,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200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비평 활동 중이다.
차례
추석전야(秋夕前夜)
하수도 공사(下水道工事)
홍수전후(洪水前後)
호박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모든 객관적 정세가 나를 이곳에 머물으게 하지 않으므로 나는 이곳을 떠나고야 만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나도 종시 사람인지라 어찌 한 줄기의 별루가 없으랴마는 나는 보다 더 뜻잇는 상봉을 위하야 떠나는 것이다. 군이 만일 나의 뜻을 알고 나를 사랑할진대 그대 스스로 모든 환경을 돌파하고 자체를 편달하야 나아갈 수 있는 용기(勇氣)를 가진 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굳세인 벗이 되어저라. 오직 바라는 바이니 원컨대 오직 끝까지 건강하라.
一九三一. 十二. 十三. 떠나는 동권
애인의 주고 간 글을 읽고 또 읽든 그는 동창 미닫이를 열엇다. 나비송이 같은 눈송이가 펄펄 춤을 추며 날린다. 그는 빛나는 눈으로 나리는 눈발을 치어다보며 애인의 유훈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눈은 말없이 쌓이고 쌓인다.
-<하수도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