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20대 초반의 백철은 동경 메이데이 행렬에 들어가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고 있었다. 시동인지 ≪지상낙원(地上樂園)≫의 일원으로 활동할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나프에 가입하고 ≪전위시인(前衛詩人)≫과 ≪프롤레타리아시(詩)≫에 시를 발표할 때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카프의 맹원이 된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귀국 후에 지상에 발표한 첫 평론이 <농민문학 문제>였다. 이 글에서 그는 빈농에게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주입할 것이 아니라 농민 고유의 세계관을 작품에 잘 반영하고, 농촌의 일상생활과 환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프에서 프로문학의 의의를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하던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1933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조선일보≫에 발표한 <문예 시평−인간 묘사 시대>가 문제였다. 인민성, 당파성, 전형의 창조, 현실 반영론 등 프로문학의 기계주의적인 창작론에 회의를 느끼면서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화 등 카프 진영의 주요 인사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프 제2차 검거 사건인 ‘신건설사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뒤 감옥에서 <인간 묘사론 기삼>을 발표했다. 계급주의자의 외피를 벗고 작가 개인이 자신의 재능으로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하며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 문학의 본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감 중 1927년 유학 시절부터 7년 동안 맹신해 왔던 유물변증법이 간과한 것이 무엇이었나 생각했다.
그가 정치주의의 편견을 버리고 취한 것은 결국 문학 그 자체였다. 문학의 진실이란 것은 이념의 문학이 아닌 현실의 문학, 삶의 문학이었다. 카프를 탈퇴한 문인 중 상당수가 일제 강점기 말에 대동아공영권과 내선일체사상에 동조하여 친일문학에 앞장서게 되는데 백철은 이때도 ‘문학의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이념에 경도된 문학에 넌더리를 낸 백철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대다수 문인이 친일문학 작품 쓰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매일신보≫의 북경 특파원을 자청하여 1942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북경에 가 있으면서 ‘친일’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해방 후 백철은 좌익으로 회귀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문학 이론을 고수했다. 근대문학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논하면서 백철은 개인의 자유, 자아의 해방, 개성의 발전을 논했다. 휴전 이후에는 계속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문학사 기술에 전념하고 서구의 뉴크리티시즘을 소개하는 일에 앞장섰다. 원론 비평과 함께 현장 비평에서도 그는 항상 열심이었다. 1960년에 백철은 황순원과 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두고 소설 작법 논쟁을 벌이고 최인훈의 ≪광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두고 평론가 신동한과도 논쟁을 벌였다.
그는 1945년 10월부터 대학 강단에 서서 1973년 2월까지 27년 동안 후학을 키운 교육자였다. 또한 1956년 영국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이후 1977년 2월에 한국국제펜클럽 회장을 사임할 때까지 20년 동안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을 한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그의 중요한 업적이다. 하지만 백철이 우리 평단에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이데올로기의 급류에 휩쓸려 가지 않고 문학작품 속에서 인간성을 탐구한 것, 즉 휴머니즘문학론의 정립에 있다고 봐야 한다.
200자평
백철은 이데올로기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정치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나 문학작품 속에서 인간성을 탐구하고 문학의 진실을 구했다. 이론에서도, 현장에서도 그는 항상 열심이었다. 그가 정립한 휴머니즘문학론은 우리 평단에 큰 족적을 남겼다.
지은이
백철은 1908년 3월 18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정산동에서 소지주인 백무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세철(世哲). 향리 서당에서 열두 살 때까지 한학을 배웠다. 어머니와 형 백세명이 천도교도여서 백철은 어릴 때부터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형 때문에 어머니가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치도곤으로 호되게 맞아 이때부터 일본에 대한 저항심을 갖게 되었다.
1921년 신의주공립보통학교 6학년으로 편입하여 다음 해에 졸업했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5년 동안 줄곧 수석을 했다. 1927년에 졸업하고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교지에 습작시 <입술>, <K 양에게> 등을 발표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시동인지 ≪지상낙원(地上樂園)≫에서 활동하면서 <우박이 내리던 날> 외 여덟 편의 시를 발표했다. 김용제 등과 교류하면서 계급주의문학에 경도되어 나프의 일원이 된다. 이후 동인지 ≪전위시인(前衛詩人)≫에 <나는 알았다, 삐라의 의미를>과 <9월 1일>을, ≪프롤레타리아시≫에 <다시 봉기하라> 외 네 편의 시를 발표한다. ≪지상낙원≫에 평론 <프롤레타리아시의 현실 문제에 대하여>(1930. 5)와 <프롤레타리아시론의 구체적 검토>(1930. 6)를 발표한다.
1931년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천도교계 잡지인 ≪개벽≫지의 기자로 근무한다. ≪조선일보≫에 평론 <농민문학 문제>를 발표하면서 국내에서 평론 활동을 시작하는데 한동안 신경향파적인 글을 발표한다. 1934년에 제2차 카프(KAPF)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전주 형무소에 1년 반 동안 수감된다. 1935년 12월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자마자 <비애의 성사>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7년 동안 유물변증법 창작 방법론에 입각하여 작품을 써 온 백철은 교도소에서 도식주의적 이념 주입에 회의를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공백 지점에 찾아든 것이 인간에 대한 탐구 혹은 휴머니즘문학론이다.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내세운 문학이 간과하기 쉬운 문학의 독자성을 옹호하고 순수한 인간성을 탐구하는 문학관의 전파에 힘을 쏟게 된다.
1939년 ≪매일신보≫ 문화부장에 취임하고 1940년 중편소설 <전망(展望)>을 ≪인문평론≫에 발표한다. 1942년, 일제의 협조 강요를 피해 북경 특파원을 자청, 중국 북경에 간다. 광복 직전에 귀국하여 광복 후 중앙신문사 편집국 차장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10월에 서울여자사범대학 교수로 취임한다. 해방 공간의 어수선함 속에서 성실하게 비평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47년부터 ≪조선 신문학 사조사≫ 집필에 들어가 1949년에 상·하권으로 간행한다.
많은 문인이 월북하고 이념 대립이 첨예화될 때 백철은 대립의 현장에서 물러나 후학을 키울 결심을 한다. 1948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취임했다가 다음해 동국대학으로 옮긴다. 1952년 서울대 문리대 및 동 대학원 강사를 역임하고 1955년 중앙대학교 문리대학장으로 취임한다.
1956년 영국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데 이때부터 세계적인 문인들과 교류하며 한국문학의 위상 제고에 진력한다. 1957년 미국 예일대학과 스탠퍼드대학 교환교수로 가 있게 된 이후 뉴크리티시즘 이론을 국내에 활발히 소개한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轉換의 美學>을 발표, 문단의 자각을 촉구한다. 그해 브라질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고 1961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위원장에 취임한다. 이해에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다. 1965년 유고슬라비아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고 1966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된다.
1968년 ≪백철 문학 전집≫(4권)을 출간한다. 1969년에 프랑스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고 1970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제37차 국제펜클럽대회에서 대회장을 맡는다. 1971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1972년에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한다. 1972년 중앙대 대학원장이 되고 1973년에 중앙대학교를 정년퇴임한다. 1975년 자서전 ≪진리와 현실≫(2권)을 발간하고 1977년 한국펜클럽 회장을 사임한다.
1985년 10월 13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 자택에서 영면한다. 유족은 부인 최정숙 여사와 4남 3녀가 있으며 15일 문인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유해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낙산리에 안장되었다.
엮은이
이승하는 1960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고 김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쳤다. 1996년 중앙대에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풍자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화가 뭉크와 함께>가,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비망록>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2년 월간 ≪현대시학≫에 <산업화 시대의 시인들>을 6개월 연재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계간 ≪한국문학평론≫, ≪시안≫, ≪시로 여는 세상≫, 월간 ≪문학사상≫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문학나무≫ 편집위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불의 설법≫ 등이, 문학평론집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10대 명제≫, ≪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집 떠난 이들의 노래≫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지훈상, 중앙문학상, 시와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차례
農民文學의 問題
人間描寫論
批評의 새 任務-基準 批評과 鑑賞 批評에의 關係
悲哀의 城-出監하고서 느낀 일들
文藝 時感
文人의 死와 文壇的 原因−文壇 時感
現代 思潮로서의 휴우머니즘
文學을 爲한 附議
三千萬人의 文學-民衆은 어떤 文學을 要望하는가
文壇 再建의 課題-낡은 것과 새것의 代置가 緊急
再形成期의 文學論-古典論·飜譯文學이 그 序章
自然主義의 克服을 위하여-傳統과 人間에 쏟아지는 愛情으로
世界文學과 韓國文學
해설
백철은
엮은이 이승하는
책속으로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빈농에 대한 견해와 정책은 결코 빈농 계급에게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기계적으로 명령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구체적 실천 내용에 관철된 프롤레타리아의 감화력에 의하여 빈농에게 일정한 방향을 가르치며 일정한 행동의 지남석이 되는 데서 빈농 계급이 자발적으로 그 영향하에 들어오도록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農民文學의 問題>
새로운 文學의 공작을 위하여 우리는 古典文學과 그 전통에 대한 추구를 실천에 옮겨야 할 일이다. 우리가 자연주의를 극복한다든가 散文文學의 독자적인 성격과 수법을 규정하는 과제는 결국은 어디다가 입각하고 하는 일인가 하면 고전문학의 계승을 전제로 삼는 일이다. 그 때문에 우리 문학이 좀 더 고전문학의 연구가들과 유기적인, 실천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필요하며 나아가서 그것을 옮겨다가 하나의 현실적인 방법으로서 再生시키고 발전시키는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自然主義의 克服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