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이 책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90년에 발간한 『영인표점한국문집총간(影印標點韓國文集叢刊)1』에 수록된 『서하집(西河集)』에 실린 총 197편의 글 가운데 45편을 가려 뽑은 것입니다.
『서하집』은 고려 무인 집권기를 대표하는 임춘(林椿)의 문집이다. 임춘이 평생 동안 쓴 시(詩), 서(書), 서(序), 기(紀), 전(傳), 계(啓), 제문(祭文) 등을 엮은 것이다. 『서하집』은 총 6권으로, 권1∼3에 고율시(古律詩) 144편, 권4에 서(書) 18편, 권5에 서(序) 6편, 기 6편, 전 2편, 권6에 계(啓) 15편, 제문 6편이 실려 있다.
임춘이 죽은 지 20여 년 뒤에 이인로(李仁老)가 남은 원고를 수습하여 편집하고 서문을 지었다. 이인로가 죽은 2년 뒤에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崔瑀)의 도움으로 『서하집』이 처음 간행되었다. 처음 간행된 것은 현재 완질로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4·5권만이 『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에 기재되어 있다. 조선 숙종 39년(1714)에 14대손인 임재무(林再茂)에 의해 중간되었다. 또 고종 2년(1865)에 후손 임덕곤(林德坤) 등이 목활자본으로 중간했는데, 숙종 39년에 간행된 것과 거의 같고, 서문과 발문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다음에는 1957년도에 간행되었는데, 고종 2년에 간행된 것과 내용이 같고 서문만 추가되었다.
숙종 당시 초간본이 인멸되어 전하지 않았는데, 『서하집』이 중간될 수 있었던 것은 청도 운문사 스님인 인담이 꿈에 한 도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구리로 만든 탑에서 다시 찾아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한다. 또한 원래 소장자는 담인(淡印)이었는데, 뒤에 다시 발견한 사람이 인담(印淡)이었다는 점이 기이하다 해서 후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역대 시화집(詩話集)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임춘은 고려 무인 집권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임춘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대의 명문장가였던 이인로가 말한 것처럼, 배우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문장을 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동양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굴원(屈原)과 송옥(宋玉) 사이에 임춘을 세울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글을 잘 지었다고 한다.
무신 정변이 발발하기 이전 지배층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글을 배워 관료로 출세하는 것을 지향했다. 임춘 역시 어렸을 때부터 큰아버지인 임종비(林宗庇) 밑에서 글을 배우고 과거를 봐서 출세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신 정변으로 가문이 화를 당하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못했다.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
『서하집』에는 이러한 임춘의 인생 역정이 그대로 녹아나 있다. 『서하집』에 실려 있는 글 중 많은 부분이 7년간 타향살이를 하던 시절에 쓰였는데, 대부분 고뇌와 실의에 차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글들이다. 문집 곳곳에서는 과거를 통해 입신출세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좌절하여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모습도 보인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자신을 천거해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과 벗하면서 사는 즐거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또한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목격한 무신 정권 치하 민중들의 궁핍한 삶을 읊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과 절친한 죽림고회(竹林高會) 친구들의 방문에 감사하며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상적인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노래하기도 했다.
어려운 현실에 처한 임춘의 솔직한 심경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서하집』은 역사 앞에 좌절하고 고민하는 문인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 아울러 현전하는 고려 시대 문집이 매우 적다는 점에서 『파한집(破閑集)』,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함께 무신 집권기를 전후한 문단의 상황과 문인들의 의식 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그가 지은, 술을 의인화한 <국순전(麴醇傳)>, 돈을 의인화한 <공방전(孔方傳)>은 한국 가전문학(假傳文學)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문학적 풍토는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아뢰거나 치하하는 글인 계(啓)를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평가받는 큰아버지 임종비의 영향을 받아 임춘은 그러한 경향이 더 강했다. 『서하집』에 실린 글에는 한 편에 하나 또는 서너 개의 고사를 조합하여 함축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했다. 따라서 고사의 내용이나 고사가 나온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하집』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하집』에 실린 글은 우리나라 역대의 좋은 문장만을 뽑아서 모아놓았다는 『동문선(東文選)』과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200자평
『지만지 고전천줄』의 227번째 책《서하집》. ≪서하집≫은 고려 무인 집권기를 대표하는 임춘의 문집이다. 임춘이 평생 동안 쓴 시(詩), 서(序), 서(書), 기(紀), 전(傳), 계(啓), 제문(祭文) 등을 엮은 것이다. [양장본]
▶ 이 책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90년 발간한 ≪영인표점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서하집≫에 실린 총 197편의 글 가운데 45편을 가려 뽑은 것이다.
지은이
임춘(林椿)은 고려 무인 집권기를 살았던 인물로,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다. 그의 출생 및 사망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의종 대에 태어나서 30대 후반 또는 40대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할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임중간(林仲幹)이며, 그의 아버지는 상서(尙書)를 지낸 임광비(林光庇)였다. 그의 집안은 귀족으로서 상당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큰아버지인 임종비(林宗庇)와 아버지가 문장을 잘 지어야만 될 수 있는 한림원 학사를 지냈고, 작은아버지인 임민비(林民庇)가 지은 글이 ≪동문선≫에 여러 편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집안은 귀족 사회 내에서도 상당한 문장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종비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리하여 임종비의 학문 세계, 문장을 짓는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7세에 경서를 통달했다고 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며, 친구인 이인로가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문장을 잘 짓기로 명성이 났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과거를 통해 입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이 20세를 전후하여 무신 정변이 발발하면서, 그의 삶은 일대 전환을 맞았다. 무신 정변으로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왔던 공음전(功蔭田)까지 탈취당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으며, 친지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영남 지방으로 피신하여 7년간 타향살이를 했다.
이런 도중에도 그는 글을 짓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관료가 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쓰기도 했다.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뒤에도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으로 내려가 실의와 곤궁 속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했다.
이인로·오세재·이담지·조통·황보항·함순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한 죽림고회를 만들어 술을 벗하며 문학을 논했고,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위로했다.
문집으로는 ≪서하집≫이 있다. ≪고승전(高僧傳)≫을 편찬했다고 하지만, 현재 전해지지는 않는다.
옮긴이
이정훈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
고려 시대, 그중에서 정치제도 및 정치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결실로 ≪고려 전기 정치제도사 연구≫(2007, 혜안)를 출간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서하선생문집 서문
권1 고율시
붓과 먹을 보내준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다
칠석에
8월 15일 밤에
꿈속의 일을 적다
승려 익원에게 부치다
한양에서 현량 오세재가 찾아오니, 시를 지어 감사의 뜻을 표하다
미수를 그리워하면서
갑오년 여름에 강남으로 피난을 가면서 유랑하는 한탄이 있어서 장단가를 짓고 그것을 <장검행>이라고 했다··39
권2 고율시
가슴에 품은 것을 쓰다
역락이 근래 시를 짓지 못하는 것을 희롱하다
장단을 지나면서
장단호 위에 초당을 완성하여 이사에게 시를 지어 보여주다
미수 이인로가 일찍부터 말을 조심했으므로 시를 지어 그를 놀리다
6월 15일 밤에 비가 개고 달을 마주하니 감회가 생겨서·54
영남사의 죽루에서
학사 정지원이 남긴 시에 운을 따서 시를 짓다
미수를 보내면서
상국 이광진의 만사를 쓰다
권3 고율시
시를 지어 장원을 한 미수 이인로를 축하하다
가을날에 담지를 방문하다
우후가를 읽고 미수와 함께 시를 짓다
세 명의 학생의 방문을 기뻐하며
상주 기생 일점홍을 희롱하다
다시 개경에 도착하여
담지에게 주다
권4 서간
학사 이지명에게 올리는 편지
이부낭중 이순우에게 서해를 천거하여 올리는 편지
황보약수에게 보내는 편지
소동파의 문장을 논해서 미수에게 보낸 편지
이 학사에게 올리는 편지
권5 서·기·전
추석에 술을 마시는 모임을 노래한 글의 서문
미수 이인로를 보내는 글의 서문
충주로 부임하는 황보항을 보내는 글의 서문
소림사 중수기
화안기
일재기
동행기
국순전
공방전
권6 계·장·제문
왕 사인을 축하하면서 올린 글
상주 서기 정소에게 감사하여 올린 글
사촌 형에게 답하여 올린 글
장원한 이 미수를 축하하면서 올린 글
복원 도리를 제사 지내는 글
황보원을 제사 지내는 글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가슴에 품은 것을 쓰다(書懷)
옛 시인들은 시 때문에 곤궁했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시 짓는 일에도 뛰어나지 못하다네.
하지만 무슨 일로 몇 년 동안 곤궁함이 뼛속에 사무칠까?
오랫동안 굶주린 것이 두릉옹(杜陵翁)과 같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