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선우휘는 1950년대 행동주의, 휴머니즘,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문학 세계는 그가 공산주의를 등지고 월남한 이북 출신이라는 사실과, 사회 부조리를 현장에서 바라보는 기자라는 점이 그의 문학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현장적이면서도 이념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불꽃>의 주인공 고현은 행동을 취해야 할 상황에서 갈등하거나 실행을 포기한다. 국민 개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해 국민 희생의 논리가 되어 버린 일본 제국주의와 사회적인 비판 세력을 좌익으로 규정짓는 우파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현실적으로 해결해 나아가지 못하는 비(非)행동주의자다.
이러한 모습은 고현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달라진다.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와 인민재판을 실시하고 그것을 혁명으로 규정하자 자신에게도 위협이 다가옴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분노의 불길”이라는 감정과 감각에 의존한 것이다. 이 감정과 감각은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현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하는 일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행동하는 자가 된다. 그는 휴머니즘이라는 미명 아래 좌파를 적군으로, 우파를 아군으로 만드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도 모르게 봉사한다. 그는 자신이 우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안경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면서 그 안경으로 세계의 이것저것을 바라보고 있는 지적(知的)인 무지자(無知者)다. 사실 고현이라는 인물은, 지난 세월 우파 민족주의를 무의식에 지니고 있는 한국 사회 보수주의자의 초상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공산주의의 논리에 희생당하는 인물들을 초점화한 소설 <깃발 없는 기수>에서도 마찬가지다.
200자평
1950년대 행동주의, 휴머니즘,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선우휘의 <불꽃>과 <깃발 없는 기수>를 엮었다. 공산주의를 등지고 월남해 기자로서 활동하며 사회 부조리를 현장에서 바라본 경험이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 난다.
지은이
선우휘(鮮于煇)는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동에서 부친 선우억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사범학교 본과 3년을 마친 뒤 귀향해 구성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해방 이듬해에 월남해 조선일보사에 입사, 사회부 기자가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에는 인천중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1949년에는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1950년에는 전진군단 유격대장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 활동은 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1955년 단편 <귀신>을 <신세계>에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1956년에는 단편 <ONE WAY>를 <신태양>에, <테러리스트>를 <사상계>에 실었고, 1957년에는 화제작이자 그의 대표작인 단편 <불꽃>을 <문학예술>에 게재했다. 이 작품은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그 이후 대령으로 예편하고, 한국일보사를 거쳐서 조선일보사에서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편 <깃발 없는 기수>를 비롯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작품집으로 ≪반역≫, ≪망향≫, ≪쓸쓸한 사람≫, ≪노다지≫, ≪선우휘 문학선집≫ 등을 출간했다.
1986년 취재 중 부산에서 뇌일혈로 별세한 선우휘는 1950년대 행동주의, 휴머니즘,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문학 세계는 그가 공산주의를 등지고 월남한 이북 출신이라는 사실과, 사회 부조리를 현장에서 바라보는 기자라는 점이 그의 문학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현장적이면서도 이념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엮은이
강정구(姜正求)는 1970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988년에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해 경희대 국문과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 1992∼1995년에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 과정을, 그리고 1995∼2003년에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대학원 시절에는 주로 시인론에 주력했다. 한 시인의 생애와 문학을 통해서 문학의 맛과 멋을 풍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김지하의 서정시 연구>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신경림 시의 서사성 연구>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대학원을 졸업해 그 이듬해에 계간 <문학수첩>에서 주관하는 제2회 문학수첩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된 뒤 활발한 문단 활동과 학술 활동을 병행하면서,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로 삼았던 것은 ‘민중시 다시 읽기’였다. 민중시라는 형식은, 1960∼1990년대 진보적 민족문학론에 의해서 진리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문학으로 설명되었으나, 그것은 문학을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왜곡하는 것이라는 심증을 가졌기 때문이다. 진보적 민족문학론이 바라본 민중시와 민족문학을 ‘다시 읽기’ 하는 작업은 기존의 중심 담론과 시각의 해체였고 재구성이었다.
이 과정에서 프란츠 파농,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가야트리 스피박으로 전개되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과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가라타니 고진, 슬라보예 지젝으로 이어지는 다종다양의 ‘포스트 담론’은 일종의 교과서였고, 권위의 세계를 다시 읽는 방법이 되었다. 신경림의 시를 변혁적·투쟁적인 경향이 아니라 혼성과 모방의 서사로 읽고자 한 논문 <신경림 시에 나타난 민중의 재해석>과 <탈식민적 저항의 서사시>가 그 중간 성과물이었다. 나아가 논문 <1970∼1990년대 민족문학론의 근대성 비판>과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민중시관 재고>를 통해서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시각을 문제 삼고자 했다. 앞으로 당분간 이러한 ‘다시 읽기’라는 방법에 매진할 계획이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21
불꽃 ······················23
깃발 없는 기수 ·················107
엮은이에 대해 ··················279
책속으로
결국 너는 살아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 본 일이 없다면 죽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살아본 일이 없이 죽는다는 것? 아니 죽을 수도 없다는 안타까움이 현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공포의 감정을 휘몰아왔다. 현은 잃어져 가는 생명의 힘을 도꾸어 이 공포의 감정에 반발했다.
-살아야겠다. 그리고 살았다는 증거를 보이고 다시 죽어야 한다-
현은 기를 쓰는 반발의 감정 속에서 예기치 않는 새로운 힘이 움터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이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 무게를 가하드니 전신에 어떤 충족감이 느껴지자 현은 가슴속에서 갑짜기 우직하고 깨뜨러지는 자기 껍질의 소리를 들었다. 조각을 내고 부서지는 껍질. 그와 함께 거기서 무수한 불꽃이 뛰는 듯했다. 그것은 다음 차원(次元)에의 비약을 약속하는 불꽃. 무수한 불꽃. 찬란한 그 섬광. 불타는 생에의 의욕. 전신을 흐르는 생명의 여울. 통절히 느껴지는 해방감.
-<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