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개화기 일본의 식탁에 세계화의 문을 열다
무라이 겐사이(村井弦斎, 1864∼1927)의 식도락은 지금으로부터 약 110여 년 전인 1903년 ≪호치신문(報知新聞)≫에 연재되었던 신문 소설로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총 네 편으로 구성된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이 연재되던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개화라는 이름 아래 밀려오는 서양 문물에 하루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간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과 조선,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의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공존하던 시대였다. 특히 식문화 부분에서 변화가 컸는데, 거의 1000년 이상 지속되어 왔던 육식 금기가 해제되어 여러 가지 고기 요리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포크나 나이프 같은 생소한 서양식 식사 도구는 물론, 파인애플이나 타피오카 같은 이국적인 식재료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하루빨리 익숙해져 ‘하이칼라’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서양에 대한 상식이나 예의범절,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대한 기본적 지식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줄 교양서가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식도락≫은 이러한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등장한 소설이자 식문화 전문 교양서다.
소설의 참맛은 “재미”에 있다
≪식도락≫은 대중에게 올바른 식생활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한 작품이다. 그러나 식품에 대해 설명하고 올바른 식생활을 계몽하는 내용만을 담아서는 본래의 목적인 널리 대중을 계몽하기 어렵다. 이에 겐사이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재미있게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식문화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인물이나 스토리보다도 작중 인물들이 언급하는 식문화에 대한 설명 부분이 더 중요한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캐릭터 설정이나 갈등 요소의 배치 등을 볼 때 근대 소설의 초기에 등장한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100년을 앞서 식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다
≪식도락≫은 단순히 이국적인 식문화의 소개에만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과 내용을 빌려 당시 독자들에게 식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이 책이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식문화를 다룬 교양서 중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이유는 음식이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으며, 음식에 대한 태도를 통해 그 사회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먹는 음식이 건강한 재료로 만든 것이고 이를 만드는 과정도 위생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단순히 먹을거리에만 한정한 의견이 아니라 음식의 재료를 만드는 데 필요한 농업과 공업 기술의 문제, 또 그것을 만드는 가정의 주거 구조와 생활 양식의 문제,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높은 사회적 인식 수준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이 소설이 발표되었던 메이지 시대에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기농 식재료나 유전자 조작 식품 등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다. 이러한 선구적인 인식을 ≪식도락≫은 이미 100여 년 전에 제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아도 상당히 놀라운 것이다. ≪식도락≫이 제시한 이 같은 방향의 제시는 이후 이어지는 식문화를 다룬 교양서나 소설, 만화에서도 여전히 계승되어, 식문화를 바탕으로 당대 문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진단하는 더 깊은 차원의 문제까지 자연스럽게 논의할 수 있도록 주제나 내용을 제시하는 저작들이 다수 나타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자평
일본 미식의 원조, 먹방과 쿡방은 이 작품으로 시작되었다!
≪맛의 달인≫, ≪고독한 미식가≫, ≪심야식당≫ 등 일본에서는 만화건 드라마건 에세이건, “요리”, “미식”이 들어가면 인기를 얻는다. 소위 “구루메 문화”로 일컬어지는 이 일본의 미식 문화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그 주인공은 바로 1903년 ≪호치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무라이 겐사이의 소설 ≪식도락≫이다.
메이지 시대가 오기까지 천 년이 넘게 육식을 금지당했던 일본인에게 다양한 육류 요리를 소개하는 것은 물론, 서구 문물 개방에 발맞추어 근대적이고 세계적인 식문화를 소개했다. 순박한 시골뜨기 먹보 청년 오하라와, 똑똑하고 요리 솜씨가 뛰어난 당찬 아가씨 오토와의 사랑을 바탕으로 600종이 넘는 세계 각국의 요리를 소개한 이 작품은 당대에 엄청난 붐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이후 일본 식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각종 먹방 쿡방 작품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근대 일본에 유입된 서구의 식문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메이지 시대의 생활상,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 개화기 신문 소설의 특징 등을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신토불이, 자급자족, 유기농, 비건 등 오늘날의 식문화 문제까지도 고찰할 수 있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시리즈 중 첫 권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지은이
작가 무라이 겐사이(村井弦斎, 1864∼1927)는 1864년 현재의 아이치현(愛知県) 도토요하시시(豊橋市)의 무사 계급에서 태어났다. 겐사이의 아버지는 지역에서 유명한 유학자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다가오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유교보다는 서양식 학문을 익히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아들인 겐사이를 위해 겐사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가족 모두를 데리고 도쿄로 이주했다. 교육열이 높았던 겐사이의 아버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각각의 전문성을 가진 가정 교사들을 고용해 어린 겐사이가 다양한 외국어와 교양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영재 교육을 시켰다. 그 결과, 겐사이는 열두 살의 나이로 도쿄외국어학교 러시아어과(현 도쿄외국어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져 학교를 중퇴하고 설상가상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된다. 이때 우울증을 극복하고자 에이지신문(英字新聞) 공모에 낸 논문이 당선되어 신문사의 후원으로 스무 살에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귀국 후에는 호치신문(報知新聞)에 소설과 논설을 발표하면서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중 1903년 신문 소설로 발표한 ≪식도락≫이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후대의 ≪맛의 달인≫, ≪아빠는 요리사≫ 같은 미식 전문 만화나 요리 인문서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말년에는 ≪식도락≫으로 얻은 막대한 인세를 바탕으로가나가와현(神奈川県) 히라쓰카시(平塚市)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 과일과 채소, 닭과 염소 등을 스스로 기르며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스스로 먹을 음식을 자급자족하며, 깨끗하고 바른 먹거리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그의 말년의 주장은 당대는 물론 현대에도 유효한 시대를 앞선 통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옮긴이
박진아(朴珍娥)는 1985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이화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예 평론을 통해 등단했다.
현재 도쿄대학교 총합문화연구과 언어정보과학전공 박사 과정에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를 연구 중이다.
차례
머리말
1. 배 속의 신년
2. 술의 홍수
3. 숙취 깨기
4. 땅콩(南京豆)
5. 신붓감 찾기
6. 친구의 여동생
7. 대식가
8. 요리 자랑
9. 돼지고기 요리 (1)
10. 돼지고기 회
11. 착각
12. 위(胃袋)
13. 뇌(脳)와 위(謂)
14. 재활용
15. 어젯밤의 꿈
16. 선물
17. 부재(不在)
18. 고구마 요리
19. 평판
20. 큰 자신감
21. 큰 실수
22. 고구마 문어 요리
23. 두부
24. 비법
25. 불안함
26. 명물
27. 부탁
28. 음식의 맛
29. 성실한 사람
30. 만년 스프
31. 굴 요리
32. 요리의 원칙
33. 동파육
34. 다섯 개의 맛
35. 의문
36. 마음의 예의
37. 반숙 계란
38. 좋은 계란과 나쁜 계란
39. 식품에 대한 주의(注意)
40. 풍류 망국론
41. 다고토 두부
42. 커틀릿
43. 장어의 독
44. 유동식
45. 식사 처방전
46. 위장병 완쾌
47. 삼나무 젓가락
48. 도미 스프
49. 나무딸기주
50. 우메보시의 효능
51. 수돗물
52. 최상의 진미(珍味)
53. 거세법
54. 고기의 맛
55. 이치보
56. 현미죽
57. 주방 도구
58. 서화 골동
59. 가짜 풍류
60. 요령
61. 연료 절약법
62. 수고로움
63. 얼굴빛
64. 긴급 사태
65. 새집
66. 결혼 통보
67. 실행 의지
68. 마을의 호평
69. 장문의 편지
70. 아버지의 연민
71. 갑작스러운 여행
72. 새 주인
73. 오늘 아침의 밥
74. 다양한 아침 식사
75. 10일 10색(十日十色)
76. 간장 검사법
77. 콩과 보리
78. 성대한 만찬
79. 36품
80. 제삼자의 눈
81. 수제 과자
82. 와플
83. 어린이의 식사
84. 어린이의 의복
85. 가벼운 냄비
86. 돼지고기 요리 (2)
87. 마중
88. 상경
해설
부록−현대에도 통하는 ‘식(食)’의 사상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오늘은 정월 새해 첫날로 천지만물이 긴 휴식을 취하는 중에 여기에도 봄바람이 불어온다. 배 속에서도 신년을 축하하는 위(胃)의 이키치(胃吉)와 장(腸)의 조조(腸蔵). (중략) 균을 죽여서 보내라고”. 이키치 ”짬이 있으면 죽여서 보내겠지만 그 뒤에도 점점 계속 들어오는걸요. 아이고, 왔다, 이번에는 익힌 우엉이네. 익혔다고는 하지만 이름뿐이고 사실 날거나 다름없네요. 아이고, 당근도 왔네요. 영차, 이번엔 두부 지짐인가? 이 두부도 좀 수상하네요. 두부 가게에서 팔다 남은 두부를 지져서 만든 것 같은데 역시 균이 잔뜩 섞여 있어요. 이런 어묵이 들어왔네. 어묵이라는 건 생선 살로 만든 것이지만 이 어묵은 생선 살은 3할뿐이고 감자 전분이 7할, 그나마도 작년에 선물로 받은 것이네요. 조조 씨,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오늘도 쉴 수가 없겠는데요. 어정쩡하게 계속 음식물이 들어오니 언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조조 “음식만으로 멈추면 좋겠는데 지금부터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술이라도 들어온다면 100년 후에나 함께 쉴 수 있겠지”. 이키치 “술이 들어오면 일이고 뭐고 할까 보냐”라고 하는 둘의 잡담을 끝낼 수밖에 없게, 슬슬 배 속이 흔들리며 위에서부터 술의 홍수가 밀려온다. “아이고, 왔다! 도망치자, 도망쳐!” “쓰나미다! 쓰나미!”라고 외치면서 이키치도 조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8쪽
“정말 좋은 풍미네요. 이다음에는 무엇을 할까요?” 오토와 “데친 고구마에 이번에야말로 소금과 설탕 간을 해 주세요. 그리고 고운체에 비벼 갈아서 우유와 섞어 모양을 만들면 매시드라고 하는 긴톤의 겉 부분 같은 요리가 돼요. 차킨시보리는 경단 크기 정도로 만들어서 면포로 감싸서 손으로 누르는 거예요. 튀김을 만들 때는 평평하게 눌러서 계란과 밀가루로 튀김옷을 입히고 샐러드유로 튀기면 돼요. 사과튀김도 사과를 얇게 썰어서 같은 방법으로 하시면 됩니다. 고구마묵은 한천을 삶아서 그 안에 체에 비벼 갈아 낸 고구마를 넣고 그대로 굳히는 거예요. 찜은 좀 만들기 힘든데 체에 비빈 고구마에 밀가루와 계란을 넣고 섞어서 그걸 카스텔라 냄비에 넣고 한 시간 정도 찌는 건데, 그냥 끓는 물로 바로 쪄도 괜찮아요”라고 하니 평소에는 값싼 재료라고 무시받던 고구마가 오토와 씨 덕분에 오늘은 고급 요리로 다시 태어난다.
-81쪽
“그런데 오토와 씨, 그런 요리의 비법을 우리 같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면 누군가한테 싫은 소리를 듣는 게 아닌가요?” 오토와 “싫은 소리를 하신다 해도 상관없어요. 비법이다 비밀이다 해서 감추는 것은 속 좁은 짓이죠. 저는 별것도 아닌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돈을 낸 적도 몇 번이나 있어요. 그렇지만 이런 건 서로 배우면서 전체적으로 우리 나라의 요리법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른길이 아니겠어요?” 부인 “그럼요” 하고 대찬성. 야만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비밀하게 내려오는 비법이 많은 법이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비법은 큰 금기다.
-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