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서 <애나 크리스티>로, 가장 성공한 각색
<애나 크리스티>는 오닐이 1919년에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란 제목으로 첫선을 보인 작품을 각색한 것이다. 오닐은 각색을 통해 주인공을 크리스에서 애나로 바꾸고 애나에게 ‘선(善)한 창녀’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했다. 그 결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서 보호가 필요한 순수한 여성이던 애나는 <애나 크리스티>에선 육지의 삶에 환멸을 느껴 바다에서 삶을 개혁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매춘부로 탈바꿈한다. 주인공 ‘애나’는 창녀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마음만은 곱고 순수한 여성이다. 정규 교육조차 받지 못했지만 삶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지혜를 가졌고, 추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혁하려는 강인한 의지를 가졌다. 크리스와 버크는 그녀의 과거 직업을 두고 그녀의 도덕성을 의심하며 그녀를 비난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에서의 거친 삶에 지쳐 있던 두 사람은 ‘애나’를 통해 구원받는다. <애나 크리스티>는 192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 공연을 “놀라울 만큼 몰입도 높은 작품”이라며 “꼭 봐야 할 연극”이라고 극찬했다.
작품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는 오닐의 모습이 조금씩 배어 있다. 우선 애나의 굴곡진 삶은 오닐의 청년 시절을 닮았다. 애나가 아버지와 떨어져 낯선 곳에서 외롭게 지내다 상처를 입었던 것처럼 오닐 또한 기숙학교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외로움에 시달렸고, 알코올중독인 형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이후 선원이 되어 자유를 찾아 바다로 나갔다가 육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귀향을 위한 긴 항해에 나섰던 경험은 크리스와 맷이라는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재료가 된다. 오닐의 분신인 것만 같은 세 사람의 갈등은 곧 오닐 자신의 오랜 내면 갈등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와 육지의 대결 구도는 꿈과 현실, 운명과 자유의지의 끝없는 대립과 갈등을 상징하며, 오닐의 삶이 바로 그 가운데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이후 오닐의 작품에서 계속해서 중복되고 변주되어 해양극이라는 오닐 특유의 장르를 형성하게 된다.
<애나 크리스티는>로 유진 오닐은 1922년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지평선 너머>에 이은 두 번째 수상이었다. 이로써 오닐은 미국 현대 연극의 아버지라는 입지를 굳혔다.
그레타 가르보부터 마릴린 먼로까지, 최고의 ‘애나’들
<애나 크리스티>는 나중에 영화로도 각색되었는데, 그레타 가르보가 ‘애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마침 유성 영화가 막 제작되기 시작하던 때라 그녀의 목소리가 대중 관객에게 공개된 첫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영화 홍보 문구도 “가르보가 말을 한다”였다. 한편 ‘애나’라는 캐릭터를 가장 충실히 구현해 낸 것은 마릴린 먼로였다. 먼로가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애나 크리스티>의 한 장면을 연기했는데, 이 공연을 본 사람들은 먼로의 최고의 작품이자 ‘애나’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200자평
<애나 크리스티>로 유진 오닐은 <지평선 너머>에 이어 두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평생 바다에서 살아온 선장 크리스와 육지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바다를 찾아온 크리스의 딸 애나 크리스티의 갈등과 화해를 그렸다. 크리스와 애나의 갈등은 이후 오닐의 다른 작품들에서 바다와 육지, 꿈과 현실, 운명과 자유의지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주제로 중복되고 변주된다. 이처럼 오닐은 선원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바다가 배경인 작품을 여러 편 선보이며 ‘해양극’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는데, 그 초기 모습을 <애나 크리스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중에 이 작품은 영화로도 각색되는데,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대체되어 가던 시기에 그레타 가르보가 애나 역을 맡아 처음 대중에게 목소리 연기를 선보여 화제가 되었다.
지은이
“미국 현대 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진 오닐은 1888년에 연극 배우이자 아일랜드계 이민자였던 제임스 오닐(James O’Neill)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공연을 따라 계속 이곳저곳 옮겨 다닌 그는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에서 생을 마감했다.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지만 도중에 중퇴하고 어린 나이에 캐슬린 젠킨스와 결혼해 아들까지 낳았다. 그는 도피의 일환으로 배를 탔고 서인도제도와 남미를 여행하며 해양 생활을 경험했다. 오랜 바다 생활에 몸이 쇠약해져 폐결핵에 걸린 그는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고 거기서 니체와 스트린드베리 등 유럽 작가들을 만난다. 오닐은 유럽에서 그동안 이루어져 왔던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을 받아들여 미국 무대에 올리려 했다. 오닐은 두 번째 아내와 이혼한 뒤 칼로타 몬터레이와 재혼했고 몬터레이는 오닐 사후인 1956년에 오닐이 사후 25년간 발표하지 말라고 했던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를 출판 공연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 주었다.
그가 미국 연극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한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유럽에서 개발된 사조나 극작 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해 끊임없이 실험함으로써 후대 극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기법과 실험 가운데서도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불가해한 세력을 밝혀내려는” 시도였다. 그는 신에 대한 신앙과 전통적 가치 체계에 대한 신념이 붕괴된 사회에서 무엇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가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희극보다는 비극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닐은 후기로 가면서 자전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얼음장수 오다(The Iceman Cometh)>,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사실주의 작품으로 회귀했고 원숙한 경지를 보여 주며 노벨상과 4회에 걸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미국 현대 연극의 기초를 놓은 유진 오닐은 후배 극작가들의 영원한 영감과 영향력의 원천이 되면서 미국 연극의 아버지로 남아 있다.
옮긴이
이형식은 경북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영문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문학과영상학회 회장과 현대영미드라마학회 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현대미국희곡론≫, ≪영화의 이해≫, ≪문학 텍스트에서 영화 텍스트로≫(공저), ≪미국 연극의 대안적 이해≫, ≪무대와 스크린의 만남≫, ≪다문화주의와 영화≫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미국 영화/미국 문화≫, ≪영화의 이론≫, ≪영화에 대해 생각하기≫, ≪숭배에서 강간까지: 영화에 나타난 여성상≫, ≪하드 바디≫ 등 다수가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4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크리스 : 우리 집안 남자들은 모두 멍청이들이야. 바다에서 온갖 헛고생을 하면서 일하고, 월급날 주머니를 두둑이 채울 생각밖에 하지 않다가 술을 잔뜩 먹고, 돈을 다 뺏기고, 그리고 또 다른 항해를 떠나는 거지. 집에 생전 오지도 않고, 좋은 남자들이 하는 일은 하나도 못하지. 그러면 바다라는 그 악마가 조만간 그놈들을 다 삼켜 버리지.
애나 : (흥분해서 웃으며) 멋진 친구들이네요. (그리고 재빨리) 그런데 우리 집안 여자들도 모두 선원과 결혼했어요?
54-55쪽
애나: (쓰디쓴 웃음을 웃으며) 멋진 기회가 왔네! 정말 웃겨 죽겠어! 정말 그러는지 내기할까? 두고 보라고! (그녀는 뒤쪽 식탁에 서서 싸늘한 조롱기 있는 미소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그리고 감정을 통제하려고 애쓰며 차분하게 말한다.) 우선, 두 사람에게 말할 게 있어. 당신들 두 사람 중 하나가 나를 소유해야 할 것처럼 말했지. 그런데 아무도 나를 소유할 수 없어, 알겠어? 나 자신 말고는.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고, 어떤 남자도, 그게 누구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 두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나를 먹여 살리라고 부탁하지 않을 거야. 나 혼자 살아갈 수 있어. 이렇든 저렇든. 내가 내 주인이야. 그러니 허황된 꿈은 버려! 당신, 그리고 당신의 명령 같은 거!
110-111
크리스 : 너한테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해라, 애나. 그동안 힘들었던 것 이겨 내고 남은 인생 행복하기만을 바랄게. 네가 그 아일랜드 친구와 결혼해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도 그걸 원해.
애나 : (담담하게)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 하지만 아버지 생각이 바뀌셨다니 기뻐요.
크리스 : (탄원하듯이)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용서해 줄 거지?
애나 :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 당장 용서해 드릴게요.
크리스 : (그녀의 손을 잡고 키스하면서, 울먹이며) 애나 릴라! 애나 릴라!
애나 : (감동했지만 약간 멋쩍어서) 울지 마세요. 사실, 용서할 것도 없어요. 아빠 잘못도, 제 잘못도, 그 사람 잘못도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불쌍한 인생이고, 일은 벌어지는 거고, 우리가 잘못 엉켰을 뿐이에요.
크리스 : (열심히) 네 말이 맞아!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주먹을 흔들며) 그 바다라는 악마 놈 때문이야!
128-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