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양주동이 고시가 연구자로서 이름을 드러낸 것은 그의 나이 35세 때인 1937년, <향가의 해독−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야>(≪청구학총≫ 제19호)를 발표하면서부터다. 그가 향가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1934년 9월이었다. 고시가 연구에 몰두하기 전, 양주동은 불문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문학 전반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시인이자 평론가, 번역가였다. 1923년 ≪금성≫을 발간하며 시와 번역시, 평론을 발표한 이래로 근 10여 년 동안 언어와 문학, 문학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바탕으로 문단의 주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민족문학의 본질과 의미,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펼쳐진 양주동의 시론, 번역론, 문학론은 한국 현대문학의 형성과 전개에 크게 기여했다.
양주동은 시를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느낀 바 정서를 개성과 상상을 통하여 가장 단순하고 솔직하게 음률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 정의하며 시의 본질이 운율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것이 형식운율이든 내용운율이든, 재래의 정형시든 파격의 자유시든, 시에는 반드시 운율이 있어야 하며 그 운율은 시의 내용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운율은 시인에 의해, 시의 내용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양주동은 1920년대 문단에 ‘조선시의 운율’을 정립할 것과 문학 이론에 대한 적확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조선시의 내적 충실’을 요구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형성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시를 번역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 시의 내용과 사상을 소개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번역이 필요하다면 허술한 의역보다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번역이란 외국어를 모르는 독자에게 외국문학의 내용과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문은 원작에 충실해야 하며 민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체, 즉 읽기 쉬운 당대의 일반적 문체를 따라야 한다. 달리 말하면 번역가는 원작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매개자로서 조선어를 존중하고 독자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번역문학은 조선문학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번역론에 입각하여 양주동은 “역어를 좀더 연활(軟滑)하게 할 것”, “한자의 고삽한 것을 피”할 것 등을 요구했다. 요컨대 번역을 통해 독자의 감성과 조선문학의 외연을 확장하고자 했다.
1920년대 중반, 양주동은 국민문학과 계급문학으로 양분된 문단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절충주의 문학론을 펼쳤다. 국민문학이 민족 전통의 복원, 민족 언어의 우수성 고양, 동포애와 민족의 단합 고취 등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문학을 주장했다면, 계급문학은 민족의식을 계급의식의 모순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라 비판하며 계급의식에 대한 각성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한 문학을 강조했다. 이에 양주동은 국민문학의 입장에서 계급문학을 인정하는 절충과 통합의 문학론을 전개하며 민족과 계급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민족문학의 건설을 주창했다. 양주동에게 조선인은 민족의 구성원이자 무산계급이며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은 배타적 의식이 아니라 충분히 절충·통합될 수 있었다. 그의 절충주의 문학론은 식민 현실의 극복이라는 대전제 하에 양대 문학의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고 새로운 민족문학을 건설하고자 했던 역사적 전망과, 문학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했던 양주동의 문학적 이상을 잘 보여 준다.
200자평
고시가 연구자로서 독보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진 양주동은 문학 전반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시인이자 평론가, 번역가였다. 언어와 문학, 문학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바탕으로 문단의 주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민족문학의 본질과 의미, 방향성을 모색한 그의 평론은 한국 현대문학의 형성과 전개에 크게 기여했다.
지은이
양주동(梁柱東, 1903∼1977)은 1903년 6월 24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호는 무애(无涯)다. 1914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학(漢學)과 한시(漢詩)에 심취했다. 1920년 상경해 중동학교 고등속성과에 입학하고 1년 만에 중학 과정을 졸업했다. 1922년 와세다대학 예과 불문학과에 입학했으며 1923년 유엽, 백기만, 이장희 등과 함께 시전문지 ≪금성≫을 발간하였다. 1925년 와세다대학 본과 영문학과에 진학해 1928년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해서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해 10년간 재직했다. 1929년 ≪문예공론≫을 발간했으며, 1930년 시집 ≪조선의 맥박≫을 상재했다. 1934년 향가 연구를 시작해 1937년 <향가의 해독−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야≫를 발표하며 고시가 연구자로 학계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1942년 ≪조선고가연구≫, 1947년 ≪여요전주≫를 발간하며 향가 해독과 고려가요 주석 등 고시가 연구의 독보적 위상을 확립했다. 해방 후 1947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했으며, 1958년 연세대학교 교수, 1962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며 동국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다. 1954년 학술원 회원 및 추천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57년 연세대학교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령하였다, 1973년 동국대학교에서 정년퇴임했으며 1977년 2월 4일 타계했다.
1923년 시전문지 ≪금성≫에 창작시와 번역시, 평론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금성≫ 1, 2, 3 각 호에 <기몽(記夢)>, <꿈노래>, <옛사랑> 등의 창작시와 보들레르, 타고르, 베를렌의 번역시를 발표하는 한편, 시와 번역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평론 <시란 어떠한 것인가>(≪금성≫ 2호, 1924. 1.), <시와 운율>(≪금성≫ 3호, 1924. 5.)에서 시론과 운율론을 전개했으며, ≪개벽≫ 4월 호의 ≪금성≫ 평을 보고−김안서 군에게>(≪금성≫ 3호, 1924. 5.)에서 김억의 ‘창작적 의역’을 비판하며 원문 중심의 ‘충실한 직역’을 주장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시론, 번역론, 문학론 등 문학 전반에서 논쟁적 비평을 전개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특히 절충주의 문학론을 통해 국민문학과 계급문학의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과 계급, 문학의 본질과 사회적 역할을 통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민족문학의 논리를 심화·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고시가 연구는 물론 시, 수필, 번역 등 문학 전반에 걸쳐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 ≪조선고가연구≫(1942), ≪여요전주≫(1947), ≪국학연구논고≫(1962) 등의 연구서와 시집 ≪조선의 맥박≫(1930), 수필집 ≪문주반생기≫(1959), ≪인생잡기≫(1962), ≪지성의 광장≫(1969), 번역시집 ≪영시백선≫(1946), ≪현대 영시선≫(1946), ≪T. S. 엘리어트 시전집≫(1955) 등이 있다.
엮은이
방인석은 1972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1998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조태일 시 연구>로 문학 석사 학위를, <김수영 시의 탈식민성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쳤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차례
詩란 엇더한 것인가
시와 운율
≪개벽≫ 4월 호의 ≪금성≫ 평을 보고−김안서 군에게
徹底와 中庸−現下 朝鮮이 가지고 십흔 文學
丙寅文壇 槪觀−評壇, 詩壇, 小說壇의 鳥瞰圖
文藝批評家의 態度 其他
文壇如是我觀
丁卯評論壇總觀−國民文學과 無産문학의 諸 問題를 檢討 批判함
문예상의 내용과 형식 문제−현 문단의 제 이론을 중심으로 한 단편적 고찰
問題의 所在와 異同點−主로 無産派 諸氏에게 答함
續 問題의 所在와 異同點−形式 問題와 民族文學 문제에 관하여
回顧·展望·批判−文壇 諸 思潮의 縱橫觀
民族文學의 現 階段的 意義−<回顧·展望·批判>의 續
해설
양주동은
엮은이 방인석은
책속으로
자유시는, 물론 자수의 제한이 없기는 합니다마는, 그것이 시인 이상, 역시 무슨 운율이 없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면 음수율 대신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즉 다음에 말하려는 내용적 운율(혹은 내용율, 내재율, 심율)입니다.
형식운율이 傳習的, 형식적 음율임에 반하여, 내용 운율은 개성적, 내용적입니다. 내용율은 곧 시인 그 사람의 호흡이요, 생명입니다. 보통 우리가 리듬이라 할 때에는 물론 음수율의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지만, 그 주체는 이 내용율을 가리킴이 되리라고 생각할만치, 현대 자유시와 내용율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참으로 내용율을 무시하고는 시의 내용― 그 사상감정, 호흡생명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시와 운율>
國民文學과 階級文學은 一言으로 하건댄 現今 우리의 全的 目標를 爲한 努力의 ‘방패의 兩面’에 不過하다. 우리는 朝鮮人으로 無産階級이오 世界 無産階級 中 朝鮮人이란 意味로 보드라도 넉넉히 這間의 消息을 엿볼 수가 잇다. 鬪爭의 意味로써 보드라도 民族的 鬪爭과 階級的 鬪爭은 서로 提携할 수가 잇슬 것이오 意識上으로 論하드라도 民族愛나 階級精神은 서로 矛盾될 證跡이 업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無産文藝家 側에서 極力으로 國民文學을 反動的이라 함은 넘우나 近眼的 偏見이다. 더구나 階級意識을 高調하기에만 汨沒하야 民族思想을 忘却함은 千不當萬不當한 일이오 感情的 理論으로써 國民文學 排擊론을 일삼는 것은 大蓋 그 罪過가 적다고 할 수 업다.
−<丁卯評論壇總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