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편견과 위선에 맞서 평등과 박애를 부르짖은 양심의 목소리
아직은 우리에게 낯선 헝가리 문학을 맛볼 수 있게 하는 이 소설은 쿤 벨러가 외국으로 도망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 후 세워졌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이들에 의해 해체되었던 부르주아적 사회질서가 부활하는 혼란스러운 헝가리 국내 정세와 양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 대륙의 격변기 속에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부르주아지의 모습을 코스톨라니 데죄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모습 가운데 이 소설이 특히 주목하는 점은, 부르주아지로서 안락하고 호사스러운 삶을 사는 데 불가결한 존재인 가정부를 대하는 면모다. 주인공인 가정부 에데시 언너를 대하는 비지 부부 및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신분이 낮고 직업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당시의 현실은 언너를 위해 부당함을 호소했던 양심적인 의사 모비스테르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는 단지 100여 년 전 헝가리에 한정되는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은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하다’라는 진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200자평
20세기 초 헝가리의 가정부 실태를 고발하다. 인간이되 다른 인간으로 살았던 가정부 언너. 감옥이 “지금까지 자던 부엌에 비해 여러 가지가 다 더 좋았”을 정도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던 그녀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그린다. 소설을 통해 헝가리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다시 구질서가 자리하는 시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정치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부다페스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온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을 받는 소설은 1958년 헝가리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칸 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지은이
코스톨라니 데죄(Kosztolányi Dezső, 1885∼1936)는 지금은 세르비아에 속한 수보티차[헝가리 명 서버드커(Szabadka)]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와 빈의 대학에서 2년 동안 철학과 독문학을 공부하다 대학을 그만두고 언론인으로서 활약했다. 그는 여러 신문에 기고를 하는 한 편, 시·단편소설·장편소설을 쓰고 더불어 신문에 문학평론도 쓰는 등 문학 전반에 걸쳐서 활동했다. 그는 헝가리 문학의 수준을 결정적으로 향상시킨 잡지 ≪뉴거트(Nyugat)≫ 창간에 함께했고, 또 세계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세계 각국 문학인과 친교를 맺었으며, 헝가리 펜클럽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네 개의 벽 사이에서(Négy fal között)≫(1907)와 ≪불쌍한 어린아이의 절규(A szegény kisgyermek panaszai)≫(1910)가 있다. 당시 문학의 주류는 전통적인 시골을 소재로 삼았으나, 코스톨라니에게는 도회지가 주된 관심 대상이었다. 그가 남긴 대표적 소설로는 ≪나쁜 의사(A rossz orvos)≫(1921), ≪네로(Nero, a véres költő)≫(1922), ≪종달새(A pacsirta)≫(1924), ≪황금 용(Arany-sárkány)≫(1925), ≪에데시 언너(Édes Anna)≫(1926) 등이 있다.
옮긴이
정방규는 1948년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서강대에서 독문학과 역사학을, 독일 괴팅겐에서 독문학과 헝가리 문학을 전공했다. 1990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에서 헝가리 문학에 대해 강의했다. <통일 후 독일 지성인의 심리적 갈등 연구> 등의 논문과 ≪방문객≫(1995), ≪토트 씨네≫(2008), ≪프레스코≫(2013), ≪종다리≫(2016) 등의 번역서가 있다.
차례
1. 쿤 벨러가 비행기로 헝가리를 떠나다
2. 나리, 동지, 나리 마님
3. 쓰디쓴 저녁 식사
4. 여러 가지 흥분
5. 정부와 신비
6. 언너
7. 새 빗자루는 잘 쓸린다
8. 현상
9. 케이크와 평등과 자비에 대한 토론
10. 전설
11. 젊은 주인 연치
12. 광란의 저녁
13. 사랑
14. 쓰디쓴 약
15. 겨울
16. 물질, 정신, 영혼
17. 무도회
18. 소름이 끼치는
19. 왜?
20. 푸른 울타리 앞에서의 대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처녀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그 아이가 할 것이 뭐가 있나요?” 비지 부인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물었다. “그녀는 밥을 공짜로 먹지요, 거처도 있지요, 게다가 입을 옷까지 그냥 받지 않습니까! 그들은 받은 돈을 모조리 다 저금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이 밖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들은 집을 지니고 유지비를 물 필요가 없지요. 또 음식은 무엇을 요리할까, 그리고 돈을 어디서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등등 어느 것 하나 신경 쓸 일이 없어요. 우리는 그런 걱정으로 머리가 빠지는데, 이들은 그저 아무 걱정 없이, 마음 툭 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 요사이처럼 가정부에게 더 좋을 시대는 없다고 나는 늘 말하곤 한답니다.”
-193쪽
“그러나 왜 이 처녀는 그런 범행을 저질렀을까요?” 모비스테르 씨는 자기도 모르게 혼자 물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되풀이했다. “나는 이 처녀가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아이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고, 마치 기계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녀를 기계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늙은 의사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절규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들은 이 처녀를 비인간적으로, 비인간적으로 대했습니다. 불쌍해서 못 볼 정도로 야비하게 다뤘습니다.”
-4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