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옥당한화(玉堂閑話)》는 ‘옥당에서의 한담’이라는 뜻으로, 오대(五代)의 문인 왕인유(王仁裕)가 찬한 역사 쇄문류(歷史瑣聞類) 필기 문헌이다. ‘옥당’은 당나라 말부터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옥당한화》는 당나라 말과 오대의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왕인유가 옥당, 즉 한림원에서 한림학사와 한림학사승지로 있을 때 직접 목격하고 전해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야사와 일화가 주를 이룬다. 유명 인물들의 일화를 비롯한 각종 민담과 야화, 괴담 등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오대십국 시기의 중국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사료로서의 가치
《옥당한화》에는 총 12조에 걸쳐 저자인 왕인유가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한 일이 기록되어 있어, 단순히 전해 들은 이야기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했음을 보여 주어 기록의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당·오대에 실존했던 제왕을 비롯해 고관과 문인에 관한 많은 일화들은 《구당서》·《신당서》·《구오대사》·《신오대사》 등 정사(正史)의 열전 기록과 상호 보완하거나 이동(異同)을 고찰할 수 있어서 ‘보사지궐(補史之闕)’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부녀자에 관한 고사도 여럿 있어 《구당서》·《신당서》나 《송사》와는 달리 ‘열녀전’을 설정하지 않은 《구오대사》와 《신오대사》의 ‘열녀전’을 구성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문학적 가치
‘옥당’이라는 명칭을 제목에 사용한 것은 당나라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옥당한화》는 특히 이러한 이른바 ‘옥당 문학’의 원류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옥당한화》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후대의 소설, 희곡 등 여러 문학 작품에 좋은 소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 삽입된 시들은 이후 《전당시》, 《당시기사》 등에 수록되어 당·오대의 시가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했다. 또한 《옥당한화》에는 왕인유가 직접 듣거나 전해 들은 많은 민간 고사가 보존되어 있어서 당·오대의 민간 문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민속학적 가치
《옥당한화》에는 찬자 왕인유의 고향인 천수[天水, 진주(秦州)] 지역에 관한 고사 20여 조가 실려 있어 전체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 통해 당시 진롱[秦隴, 지금의 산시성(陝西省)·간쑤성 지역]과 파촉(巴蜀, 지금의 쓰촨성 지역)의 자연환경과 사회 풍습 등을 엿볼 수 있다. 천수를 중심으로 한 진롱 지역의 산천과 풍물 및 민간 풍습 등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록한 한편, 심한 기근과 충해로 인한 피해도 자세히 기록해 당시의 지리 환경과 생태 환경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해당 지역의 인문 지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옥당한화》의 원서는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필기 문학의 전문가 김장환 교수는 《태평광기(太平廣記)》와 조선 간본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을 비롯해 북송부터 청대까지 여러 전적에 산재되어 있는 《옥당한화》의 일문을 집록해 183조로 확정하고,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달았다. 아울러 교감이 필요한 원문에 한해 해당 부분에 교감문을 붙였다. [부록]에는 〈왕인유전(王仁裕傳)〉과 〈역대(歷代) 저록(著錄)〉을 첨부했다. 현대 집록본으로는 《오대사서휘편(五代史書彙編)》[항저우출판사(杭州出版社), 2004] 제4책에 수록된 천상쥔(陳尙君) 집록본과 《옥당한화평주(玉堂閑話評注)》[중궈뎬잉출판사(中國電影出版社), 2007]의 푸샹밍(蒲向明) 집록본을 참고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옥당한화》에 대한 번역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은 국내외 초역이자 완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200자평
《옥당한화(玉堂閑話)》는 오대(五代)의 문인 왕인유(王仁裕)가 ‘옥당’, 즉 한림원(翰林院)에서 동료들과 한담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일화부터, 민담과 야화, 괴담 등은 물론, 문학, 지리, 생물 등 학문적인 내용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원전은 현재 전하지 않으나, 김장환 교수가 후대의 여러 전적에 실린 일문을 수집, 교감해 183조로 정리하고 우리말로 옮겼다. 세계 초역이다.
지은이
《옥당한화(玉堂閑話)》의 찬자 왕인유(王仁裕, 880∼956)는 오대(五代)의 문인으로, 자는 덕련(德輦)이고 천수[天水,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톈수이시(天水市)]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했고 사냥을 일삼다가 스물다섯 살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해, 문장으로 진롱[秦隴, 지금의 산시성(陝西省)·간쑤성 지역] 지역에 이름이 알려졌다. 당나라 말에 진주절도판관(秦州節度判官)이 되었으며, 진주가 전촉(前蜀)에 편입되자 중서사인(中書舍人)과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그 후로 후당(後唐)에서는 진주절도판관·도관낭중(都官郞中)·한림학사를 지냈고, 후진(後晉)에서는 사봉좌사낭중(司封左司郞中)·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후한(後漢)에서는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호부상서(戶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태자소보(太子少保)를 지냈다. 후주(後周) 세종(世宗) 현덕(顯德) 3년(956)에 77세로 생을 마쳤고,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추증되었다.
왕인유는 시문(詩文)에 능했고 음률에 밝았으며, 화응(和凝)과 함께 오대 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필기 저작으로 《옥당한화》 외에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와 《당말견문록(唐末見聞錄)》 등을 찬했으며, 시문집으로 《서강집(西江集)》 100권을 찬했지만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의 전(傳)은 《신오대사(新五代史)》 권57 〈잡전(雜傳)〉에 실려 있다.
옮긴이
김장환(金長煥)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지인소설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2004∼2005),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객원교수(2011∼2012)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 《중국 문학의 흐름》,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향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 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원혼지(寃魂志)》, 《이원(異苑)》, 《원화기(原化記)》, 《위진세어(魏晉世語)》, 《조야첨재(朝野僉載)》(전 2권),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전 2권)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1. 안진경(顔眞卿)
2. 이용창(伊用昌)
3. 권사(權師)
4. 조 성인(趙聖人)
5. 법본(法本)
6. 위빈 조자(渭濱釣者)
7. 췌육(贅肉)
8. 서명사(西明寺)
9. 이언광(李彥光)
10. 후온(侯溫)
11. 마전절 비(馬全節婢)
12. 유약시(劉鑰匙)
13. 유자연(劉自然)
14. 상공(上公)
15. 진 고조(晉高祖)
16. 손악(孫偓)
17. 대사원(戴思遠)
18. 장전(張籛)
19. 제주민(齊州民)
20. 진성 파초(秦城芭蕉)
21. 예릉 승(睿陵僧)
22. 번중 육축(蕃中六畜)
23. 야고아(耶孤兒)
24. 호왕(胡王)
25. 방종(龐從)
26. 상유한(桑維翰)
27. 방지온(房知溫)
28. 두몽징(竇夢徵)
29. 허생(許生)
30. 음군 문자(陰君文字)
31. 빈부(貧婦)
32. 관원 영녀(灌園嬰女)
33. 왕휘(王暉)
34. 배도(裴度)
35. 발총도(發塚盜)
36. 정치옹(鄭致雍)
37. 왕은(王殷)
38. 유숭귀(劉崇龜)
39. 살처자(殺妻者)
40. 갈종주(葛從周)
41. 정창도(鄭昌圖)
42. 양현동(楊玄同)
43. 고연(高輦)
44. 장준(張濬)
45. 촌부(村婦)
46. 왕 재(王宰)
47. 단성식(段成式)
48. 강릉 서생(江陵書生)
49. 진숙(陳琡)
50. 왕인유(王仁裕) 1
51. 왕인유(王仁裕) 2
52. 여귀진(厲歸眞)
53. 고병(高騈)
54. 전영자(田令孜)
55. 우구(于遘)
56. 안수(顔燧)
57. 신광손(申光遜)
58. 전승조(田承肇)
59. 사독(蛇毒)
60. 정손(程遜)
61. 진양관(眞陽觀)
62. 비호 어자(陴湖漁者)
63. 대안사(大安寺)
64. 이연소(李延召)
65. 배우인(俳優人)
66. 부조자(不調子)
67. 사마도(司馬都)
68. 이임위부(李任爲賦)
69. 진나자(陳癩子)
70. 징군(徵君)
71. 최육(崔育)
72. 호 영(胡令)
73. 군목(郡牧)
74. 장함광(張咸光)
75. 도류(道流)
76. 시마(市馬)
77. 조사사삭방(朝士使朔方)
78. 경박사류(輕薄士流)
79. 최비(崔祕)
80. 조사관(趙思綰)
81. 안도진(安道進)
82. 추복 처(鄒僕妻)
83. 가자 부(歌者婦)
84. 하지 부인(河池婦人)
85. 하씨(賀氏)
86. 진기장(秦騎將)
87. 이수란(李秀蘭)
88. 진 소주(晉少主)
89. 원계겸(袁繼謙) 1
90. 소원휴(邵元休) 1
91. 목노수위소아(目老叟爲小兒)
92. 적인걸사(狄仁傑祠)
93. 갈씨 부(葛氏婦)
94. 방식(龐式)
95. 복야피(僕射陂)
96. 유호(劉皥)
97. 최 연사(崔練師)
98. 소원휴(邵元休) 2
99. 하사랑(何四郞)
100. 양감(楊瑊)
101. 원계겸(袁繼謙) 2
102. 빈주 사인(邠州士人)
103. 왕은(王殷)
104. 사언장(謝彦璋)
105. 숭성사(崇聖寺)
106. 두종(杜悰)
107. 구양찬(歐陽璨)
108. 동가원(東柯院)
109. 왕수정(王守貞)
110. 장종(張銿)
111. 종몽징(宗夢徵)
112. 무족 부인(無足婦人)
113. 백항아(白項鴉)
114. 남중 행자(南中行者)
115. 길주 어자(吉州漁者)
116. 현종 성용(玄宗聖容)
117. 여산 어자(廬山漁者)
118. 최사팔(崔四八)
119. 이복(李福)
120. 신문위(申文緯)
121. 법문사(法門寺)
122. 상소봉(上霄峰)
123. 맥적산(麥積山)
124. 두산관(斗山觀)
125. 대죽로(大竹路)
126. 누택(漏澤)
127. 구산탁(驅山鐸)
128. 의춘 군민(宜春郡民)
129. 변백단수(辨白檀樹)
130. 죽실(竹實)
131. 윤호(尹皓)
132. 계호(械虎)
133. 상산로(商山路)
134. 왕행언(王行言)
135. 중소소(仲小小)
136. 석종의(石從義)
137. 원계겸(袁繼謙) 3
138. 안갑(安甲)
139. 서주 군인(徐州軍人)
140. 융(狨)
141. 민부(民婦)
142. 선선장(選仙場)
143. 구선산(狗仙山)
144. 주한빈(朱漢賓)
145. 우존절(牛存節)
146. 서탄(徐坦)
147. 장씨(張氏)
148. 고수(顧遂)
149. 구당협(瞿塘峽)
150. 범질(范質)
151. 남인 포안(南人捕鴈)
152. 앵(鶯)
153. 최절(崔梲)
154. 노주(老蛛)
155. 수와(水蛙)
156. 종사(螽斯)
157. 남화(蝻化)
158. 신라(新羅)
159. 번우(番禺)
160. 남주(南州)
161. 풍숙(馮宿)
162. 맹을(孟乙)
163. 진무 각저인(振武角抵人)
164. 설창서(薛昌緒)
165. 강의성(康義誠)
166. 제파(帝羓)
167. 여마구(驢馬駒)
168. 취입총중(醉入塚中)
169. 어사대 고사(御史臺故事)
170. 중별독(中鱉毒)
171. 합조산(閤皂山)
172. 우장(芋牆)
173. 점수한(占水旱)
174. 장수중 시(張守中詩)
175. 차처여복두분계(此處與襆頭分界)
176. 겁서식창(劫鼠食倉)
177. 화정(火精)
178. 사균(蛇菌)
179. 가대(假對)
180. 광왕 전욱(廣王全昱)
181. 갈당도(葛黨刀)
182. 외효궁(隗囂宮)
183. 방읍(揖)
부록
1. 왕인유전(王仁裕傳)
2. 역대(歷代) 저록(著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35. 발총도(發塚盜)
[당나라] 광계(光啓) 연간(885∼888)과 대순(大順) 연간(890∼891) 사이에 포중현(褒中縣)에 무덤을 파헤친 도둑이 있었다. 한참 동안 수색해도 범인을 잡지 못하자 장리(長吏)는 그 사건을 매우 엄하게 다그쳤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범인을 잡아 관아에 가두었는데, 그 범인이 1년이 지나도록 사실을 자백하지 않자, 그에게 온갖 모진 고문을 했다. 결국 자백 문서가 갖춰지고 몇 사람이 그 일에 연루되자, 사람들은 모두 사건 처리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범인을 처형하려 할 때, 옆에 있던 한 사람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크게 소리쳤다.
“왕법이 어찌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죽이는 일을 용납할 수 있단 말이오! 무덤을 파헤친 자는 나요. 나는 날마다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잡히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를 죽이려 하시오? 속히 그를 석방해 주시오.”
곧 그는 무덤에서 얻은 장물(臟物)을 꺼냈는데 검사해 보니 거의 차이가 없었다. 옥에 갇혔던 자도 장물을 꺼냈는데 검사해 보니 차이가 없었다. 번수(藩帥 : 절도사)가 직접 유도하며 심문했더니 옥에 갇혔던 자가 말했다.
“저는 비록 스스로 죄가 없음을 알고 있지만 모진 매질을 이겨 낼 수 없어서, 마침내 식구들에게 이 장물을 위조하게 해 차라리 죽기를 바랐습니다.”
번수는 크게 놀라 이 일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옥리의 죄를 묻고 억울하게 갇혔던 자를 방면했으며, 스스로 자신의 죄를 밝힌 자는 아전의 직책을 주고 포상했다.
45. 촌부(村婦)
[당나라] 소종(昭宗 : 이엽)이 양주(梁主 : 후량 태조 주온)에게 위협받아 [낙양으로] 옮겨 간 후로 기주(岐州)와 봉주(鳳州) 등 여러 주는 각각 아주 많은 병사를 기르면서 멋대로 민가를 약탈해 자급했다. 성주(成州)의 어떤 궁벽한 시골 마을에 엄청난 재물이 쌓여 있었기에, 주장(主將)은 기병 20여 명을 보내서 밤에 약탈하도록 했다. 그들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자 마을 사람들은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남자들을 모두 묶어서 가두고, 재물을 남김없이 찾아내서 자루에 넣어 쌓아 놓았다. 그런 연후에 돼지와 개를 삶고 부녀자들에게 음식을 만들게 해서 마음껏 먹고 마셨다. 그 마을에서는 집마다 일찍이 낭탕(莨菪)의 씨를 모아 두었기에 부녀자들은 그것을 듬뿍 가져다 볶고 찧어서 고춧가루처럼 음식에 넣은 뒤 그들에게 탁주와 함께 먹고 마시게 했다. 이윽고 약효가 일어나자, 마침내 어떤 놈은 갑자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땅을 파면서 “말이 땅속으로 들어갔다”라고 하고, 어떤 놈은 불에 뛰어들거나 연못에 뛰어드는 등 미쳐 날뛰다가 쓰러졌다. 그리하여 부녀자들은 남편들의 포박을 풀어 주고 천천히 기병들의 검을 가져다 하나하나 목을 베어 죽인 뒤 묻었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은 사람을 시켜 큰길로 내몰고 채찍질해 보내서 그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땅을 갈아엎다가 비로소 그 일이 드러나게 되었다.
150. 범질(范質)
사신(詞臣)들이 근무하면서 한가할 때 각자 평소에 보고 들은 일을 얘기했는데, 학사승지(學士承旨) 왕인유(王仁裕 : 본서의 찬자)와 학사 장항(張沆)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오대] 후한(後漢)의 호부시랑(戶部侍郞) 범질(范質)의 말에 따르면, 일찍이 제비 한 쌍이 그의 집 처마에 둥지를 틀고 새끼 몇 마리를 길러 이미 먹이를 받아먹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암컷이 고양이에게 잡아먹히자 수컷이 시끄럽게 지저귀다가 한참 후에 떠나더니, 곧장 다시 다른 암컷 한 마리와 짝을 이루어 와서 이전처럼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였다. 하지만 며칠 안 되어 새끼들이 차례로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다가 죽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새끼 제비의 배를 가르고 살펴보았더니, 모이주머니 속에 [가시가 달린] 남가새 열매가 들어 있었다. 이는 아마도 다시 짝을 이룬 암컷 제비가 해친 것 같았다. 무릇 혈기를 가진 모든 부류는 애증과 질투의 마음이 없었던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