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당시(唐詩)의 문학적 가치와 고전적 향기는 오늘날에도 불후의 생명력을 발휘하며 전 세계 문학 애호가들을 매료한다. 시불(詩佛) 왕유는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함께 당시의 황금기를 이끈 대시인이다.
이백이 풍류 넘치는 삶을 살며 호방한 필치와 낭만적인 서정으로 시운을 만나지 못한 개인적 시름과 울분을 토로했다면, 두보는 우국 우민(憂國憂民)의 충정을 바탕으로 침울하면서도 사실적인 필치로 전란(戰亂)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회 민생을 여실히 반영했다. 반면 불교에 심취했던 왕유는 역관역은(亦官亦隱)의 고뇌에 찬 삶을 살며 담박하면서도 고아한 필치로 세속적 번뇌에서 초탈하고 해탈한 정서를 묘사했다. 그 때문에 왕유의 시는 자연의 정취와 불가(佛家)적 선취(禪趣)가 넘치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는 속세를 떠난 서정의 극치로 이어진다.
그러나 왕유의 시적 재능은 은일(隱逸)한 서정에만 머물지 않았다. 적극 진취적인 처세를 보인 전기에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적 이상을 표출하는가 하면, 현실 사회의 불합리를 풍자하기도 했다. 또한 생애 전반에 걸쳐 창작된 교유시(交遊詩)와 증별시(贈別詩), 그리고 일상생활의 다양한 감정을 담은 작품에서 묻어나는 은근하면서도 온후한 정감은 감탄을 자아낸다.
입신 현달(立身顯達)의 꿈을 품고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 장안으로 가던 왕유는, 굳이 진시황릉을 찾아 애절한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흥망성쇠에 대한 깊은 감개를 토로할 정도로(1208쪽 <진시황릉을 찾아서> 참조) 어려서부터 이미 인생에 대한 통찰이 남달랐다. 그러므로 그는 가정적인 불행에 정치적 실의와 실절(失節)이 이어지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비관하거나 염세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적 생명 가치를 추구하며 정신적 해탈에 이를 수 있었다.
오늘날 치열한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누구도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소중한 일상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는커녕 왕왕 상대적 빈곤과 열등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몸소 밭을 갈며 인생의 참뜻을 깨닫고 희열의 노래를 부른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삶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통찰로 자신을 지켰던 왕유에게서 더욱 매력을 느낀다. 왕유의 시는 분명 고단한 현대인에게 초탈과 해탈의 지혜를 일깨워 줄 것이다.
200자평
왕유 시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박삼수 교수가 20여 년간의 연구를 총정리해 ≪왕유 시전집≫ 완전판으로 엮었다. 당나라 3대 시인의 하나로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왕유의 시 308편 376수를 모두 옮기고 각 시마다 상세한 해제를 추가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3권에는 교유시 중 창화시와 왕래시 94편 100수를 실었다.
지은이
시불 왕유(王維, 701∼761)는 시선 이백, 시성 두보와 함께 성당(盛唐) 시단의 3대가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고전 문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대시인이다. 왕유의 자(字)는 마힐(摩詰)이고 하동(河東) 포주(蒲州) 사람으로, 상서우승(尙書右丞)을 지낸 적이 있어 흔히 ‘왕 우승(王右丞)’이라 일컬어진다. 당(唐)·무후(武后) 장안(長安) 원년(701)에 태어나 숙종(肅宗) 상원(上元) 2년(761)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일생 동안 무후, 중종(中宗), 예종(睿宗), 현종(玄宗), 숙종 등 다섯 제왕의 시대를 살았다.
왕유는 중소(中小) 관료 집안 출신으로, 유년 시절부터 아주 총명해 아홉 살 때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하며 열다섯 살 때 고향을 떠나 서경(西京) 장안과 동도(東都) 낙양을 오가며 사회 진출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열아홉에 경조부시(京兆府試)에 응시해 해원(解元) 급제했다. 개원 9년 봄, 스물한 살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했고, 곧 태악승(太樂丞)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 수하의 예인(藝人)들이 오직 황제를 위해서만 공연할 수 있는 황사자무(黃獅子舞)를 사사로이 공연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濟州)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개원 23년(735) 왕유는 마침내 장구령의 천거로 우습유(右拾遺)를 제수받고 낙양으로 가서 부임했으며, 개원 24년 10월에는 현종을 따라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왕유의 정신적·정치적 지주였던 현상(賢相) 장구령이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시기와 모함으로 파면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또 형주장사(荊州長史)로 좌천되고 말았다. 왕유는 감찰어사(監察御史)부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등의 벼슬을 오가다가 개원 29년 봄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했다. 천보(天寶) 원년 좌보궐(左補闕)에 오르며 다시 입경했고 늦어도 천보 3년(744)에는 남전현(藍田縣)의 망천(輞川) 계곡에 별장, 즉 ‘망천장(輞川莊)’을 마련해 역관역은의 후기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천보 15년에 안녹산 반군의 포로가 될 때까지 여가나 휴가 때면 으레 망천 별장으로 돌아와 풍경을 즐기며 유유자적했다. 천보 9년(750) 봄, 50세의 왕유는 모친상을 당해 망천으로 돌아갔고 복상(服喪)하며 2년간 은거했다. 거상(居喪) 기간이 끝난 천보 11년 봄, 다시 입조해 이부낭중(吏部郞中)을 제수받았으며, 같은 해 이부가 문부(文部)로 개편된 후에도 계속 문부낭중을 지냈다. 천보 14년(755)에는 다시 종오품상의 급사중(給事中)으로 옮겼는데, 그해 11월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다.
천보 15년 6월, 안녹산 반군이 동관(潼關)을 함락하고 급기야 서경 장안으로 입성하자 현종(玄宗)은 부랴부랴 수행원을 대동하고 촉(蜀) 땅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왕유는 미처 그 일행을 따르지 못하고 반군의 포로가 되었다. 일부러 환자나 장애인인 것처럼 위장하며 위기를 모면코자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반군은 왕유를 낙양 보리사(菩提寺)로 압송·구금하고 그들의 벼슬을 강요했다. 왕유는 완강히 버티며 응하지 않았지만 대략 9월 이후에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위직(僞職) 급사중 벼슬이 떠맡겨지고 말았다.
지덕 2년(757)에 동·서 양경을 수복한 조정은 같은 해 12월, 그간 반군에게 억류당해 있으며 위직을 맡았던 사람들을 모두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논죄했다. 왕유는 보리사에 갇혀 있으면서 친구 배적(裴迪)에게 지어 보였던 시 <보리사에 갇혀 있는데 배적이 찾아와…(菩提寺禁裴迪來…)>로 일찍이 숙종을 감동시킨 데다 당시 형부시랑(刑部侍郞)의 높은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왕진이 자신의 관직을 삭탈하는 대신 형의 죄를 감면해 줄 것을 청원해 숙종의 특별 사면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왕유는 망천에서 한거하다가 이듬해 봄에 복관되면서 태자중윤(太子中允)에 문책(問責) 제수되었으며, 다시 얼마 후에는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가함받았다. 그리고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한 뒤 가을에 마침내 급사중에 복직되었고 상원(上元) 원년(760) 여름에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승진했다.
상원 2년 봄, 왕유는 동생 왕진이 외직(外職)인 촉주자사(蜀州刺史)로 나가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을 올려 자신의 관직을 삭탈하는 대신 동생의 내직(內職) 귀환을 청원했다. 그러나 왕진이 새로운 내직을 제수받고 귀경하는 도중인 같은 해 7월, 그리운 동생을 만나지도 못한 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역은(亦隱)’의 삶을 살았던 망천장을 개조한 사찰, 청원사(淸源寺) 서쪽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박삼수(朴三洙)는 경북 예천 태생으로 경북대학·중국 타이완(臺灣)대학·성균관대학에서 각각 중문학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찍이 미국 메릴랜드대학 동아시아언어학과 방문교수를 거쳤다. 현재 울산대학 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출판부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는 ≪왕유 시전집≫(개정 증보판), ≪왕유 시선≫(이상 지식을만드는지식), ≪쉽고 바르게 읽는 논어≫, ≪쉽고 바르게 읽는 노자≫(이상 지혜의 바다), ≪논어 읽기≫(논어 해설서, 세창미디어), ≪주역−자연 법칙에서 인생철학까지≫(현암사), ≪당시의 거장 왕유의 시 세계≫, ≪고문진보의 이해와 감상≫, ≪바르게 읽는 논어1≫, ≪맹자의 왕도주의≫(이상 UUP), ≪시불 왕유의 시≫(세계사), ≪사기(史記)≫(공역, 까치),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공저, 휴머니스트), ≪논어, 과연 얼마나 바르게 읽고 있는가?≫, ≪쉽고 바르게 읽는 장자≫(이상 근간) 등이 있다.
차례
3. 창화시(唱和詩)
친구의 운모 병풍에 적다
사군 오랑의 <서루에 올라 아득히 바라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하다>에 화답하다
숭범사 스님께 부치다
동악 태산의 초 연사에게 주다
초 도사에게 주다
조영에게 주다
노씨령 방관에게 주다
노 습유의 <위 급사의 동산 별장을 찾아서 20운(韻) 40구(句)>에 화답하다 : 위 급사의 초봄 휴가 때 내 이미 함께 노닐었고, 또 이번 유람 역시 함께하라는 명을 미리 받은 바 있으나 공교롭게도 지금 내게 거마가 없어 그 동유(同遊)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도다
윤 간의의 <사관의 원림 연못>에 화답하다
<종남산을 바라보며>를 서 중서에게 주다
형주 장 승상께 부치다
배민 장군에게 주다
아우 장인에게 재미스레 주다·3수
아우 장인에게 답하다
복야 진공의 <천자의 여산 온천 행차에 호종하다>에 화답하다
여 거사의 <석천에서 짓다>에 응수하다
원 사인이 범자 서예에도 능하고 범음에도 통달해 두 방면에서 모두 그 오묘함을 곡진히 하므로 재미스레 시를 지어 주다
원 낭중에게 거듭 응수하다
비부 양 원외랑의 <정월 대보름 밤놀이를 하다가 정자 계를 그리다>에 화답하다
이기에게 주다
위척 태수께 삼가 부치다
비부 양 원외랑이 저녁에 금대에서 묵고 아침에 서각에 올라 급히 지어 준 시작(詩作)에 응수하다
옛 친구 장인은 시도 잘 짓고 점복에도 능하면서 회화와 초서·예서에도 뛰어난데, 근자에 지어 준 시를 잘 받고 이제 이 시를 지어 응수한다
사촌 아우 고부원외랑 왕구에게 주다
구 교서의 쌍계 별장에 대해 묻다
곽 급사에게 응수하다
태상주부 위오랑의 <여산 온천 관람>에 화답하다
망천에서 한거하며 배적 수재에게 주다
배적이 망곡 어귀에서 비를 만나 종남산을 생각하며 지은 시작에 답하다
배십적에게 주다
배적에게 주다
수재 배적이 시 읊는 것을 듣고 재미스레 주다
우부 소 원외랑의 <남전 별장을 찾았다가 주인장도 만나지 못하고>에 응수하다
남전 유 현령에게 주다
수풀 우거진 전원의 풍경을 노래하며 아우 담(紞)에게 부치다
여러분의 방문에 감사하며
장 소부에게 응수하다
산중에서 아우에게 보이다
보리사에 갇혀 있는데 배적이 찾아와 역적 안녹산의 무리가 응벽지 가에서 음악 판을 벌여 이원(梨園)의 악공(樂工)들이 모두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다가 말고 문득 일시에 눈물을 흘렸다고 하매 사사로이 입으로 흥얼거려서 즉흥시를 지어 배적에게 읊어 보이다
입으로 흥얼거려 지은 즉흥시를 또 배적에게 읊어 보이다
엄 소윤과 서 사인이 나를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간 것에 시로써 응수하다
최부의 <현제에게 답하다>에 화답하다
송 중승의 <여름날 복현관과 천장사를 유람하며>에 화답하다
봄밤 대숲 정자에서, 남전으로 돌아가는 전 소부에게 주다
과원시
모용십일에게 응수하다
진 감사랑의 <가을비 속에 사촌 아우 진거를 생각하며>에 화답하다
호 거사가 와병 중에 있어 쌀을 보내면서 시를 함께 드리다
나와 호 거사가 모두 병이 나매 이 시를 호 거사에게 부치며 아울러 불도를 배우는 이에게도 보이다
좌중(座中)에서 급히 붓을 놀려 설거와 모용손에게 주다
정우의 농가에서 지어 주다
옛 오(吳)나라 땅 관리에게 주다
양 부마 여섯째 영랑(令郞)의 <가을밤 풍경을 노래하다>에 삼가 화답하다
하사가 갈건을 준 데 감사하며
재미스레 지어 소씨 생질에게 보이다
심십사 습유의 대나무 햇순이 바야흐로 그 독경처에 돋아남을 노래한 여러분의 시작에 화답하다
위목에게 주다
황하 강변의 단십육에게 부치다
사환을 재미스레 놀리다
4. 왕래시(往來詩)
제주에서 조(趙) 노인 댁에 들렀더니 술잔치를 베풀어 주다
조영이 찾아와 머물러 묵음을 기뻐하며
승여 선사와 소 거사의 숭구 난야를 찾아서
위 급사의 산장
위 시랑의 산장
정월 그믐날 대리사(大理寺) 위 경의 성남 별장을 유람하며·4수
변각사에 올라서
선 상인을 뵈오며
도일 선사의 난야에서 묵으며
청룡사 담벽 상인의 선원(禪院)에서의 모임
노상 원외랑과 함께 최흥종 처사의 숲 속 정각(亭閣)을 찾아서
소·노 두 원외랑과 방장사를 유람하기로 했으나 소 원외랑이 오지 않으매 이 시를 짓는다
노 원외랑 댁에 들러 스님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을 보고 함께 7운(韻) 14구(句)의 시 한 수를 짓다
노상과 함께 주 형(朱兄) 댁에 모여서
봄날 하수 원외랑의 약초밭을 찾아서
최 부마의 산중 연못을 찾아서
봄날 배적과 함께 신창리에 들러 여 은사(呂隱士)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다
여름날 청룡사에 들러 조 선사를 뵈옵다
여흔 습유와 배적 수재의 방문을 받고 가을밤에 비를 마주하고 짓다
배적 수재의 작은 누대에 올라서 짓다
술 부어 배적에게 주며
화감사 담흥 상인의 산원(山院)을 찾아서
화감사를 유람하며
과주 정 태수가 찾아와서
늦봄에 엄 소윤과 여러분의 방문을 받고서
모용승이 채소 음식을 가지고 찾아오다
복부산 스님께 식사를 대접하며
아우 하남윤 엄무(嚴武)가 작별차 찾아와 내 누추한 오두막집에 묵으며 각자 10운(韻) 20구(句)의 시를 짓다
이 처사의 산중 거처
이읍의 거처를 찾아서
연자감 선사의 노래
복 선사의 난야를 찾아서
향적사를 찾아서
봄날 산사의 풍경을 노래하다
이 산인의 거처를 유람하다가 초옥(草屋)의 벽에 적다
책속으로
아우 장인에게 재미스레 주다 제1수
내 아우 그대 동산에 은거하던 시절
마음으로 숭상하는 바 그 얼마나 고원(高遠)했던가!
해가 중천에 떠올라도 마냥 누웠다가
종소리 울리고서야 비로소 일어나 밥을 먹는데
목 위에는 늘어뜨린 머리채 빗지도 않았고
침상 머리맡엔 서책을 말아 놓지도 않았네
맑은 냇물 바라보며 유유자적하고
텅 빈 수풀 마주하고 한가로이 쉴 제
푸른 이끼는 돌덩이 위로 파릇파릇 정결하고
가는 풀잎은 소나무 아래로 나긋나긋 부드럽다
창밖에는 새소리 한가롭고
섬돌 앞엔 호랑이 마음 다정도 하다
온갖 사려(思慮)의 번다(繁多)함도 부질없고
현허(玄虛)한 도(道)의 심원함도 담박할 뿐이러니
사람도 만물과 다를 게 없음을 깨달으면
사람으로서 자못 천박했음을 스스로 돌아보나니
바야흐로 그대를 대하며 문득 터득한 바 있어
헛된 잡념일랑 번거로이 떨쳐 버릴 것조차 없다네
戲贈張五弟諲·一
吾弟東山時 心尙一何遠
日高猶自臥 鐘動始能飯
領上髮未梳 牀頭書不卷
淸川與悠悠 空林對偃蹇
靑苔石上淨 細草松下軟
窗外鳥聲閑 階前虎心善
徒然萬慮多 澹爾太虛緬
一知與物平 自顧爲人淺
對君忽自得 浮念不煩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