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천주(侍天主) : 한국적 평등사상
동학이 창도되었던 19세기 중반. 우리나라는 밖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서양 열강의 침탈 위기에, 안으로는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체제 위기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 더해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유행하고 가뭄과 기근 등의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해 이 땅의 민초들은 단 한시도 편하게 살 수가 없었다. 전대미문의 위기 아래서 수운 최제우는 만민평등과 만물해방의 사상으로서 ‘동학(動學)’을 창도했다.
동학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 즉 “모든 사람은 제 안에 가장 성스럽고 거룩한 존재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양반이나 평민이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시천주’의 존재로 태어나며, 또한 누구나 ‘시천주’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동학의 요지다. 《용담유사》는 모든 사람이 거룩한 ‘하늘님’을 모신 존재라는 가르침을, ‘다시 개벽’의 새 세상이 오고 있음을 실감나게 노래한 한글 가사다.
동학이 엄청난 속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파고들며 전국에 동학 네트워크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에는 《용담유사》의 역할이 지대했다. 동학의 핵심 경전인 《동경대전》이 한문으로 된 것과 달리, 《용담유사》는 평범한 부녀자, 어린이, 노비, 평민 등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한글로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1860년에 성립한 이래, 34년간의 지하 포교 시대를 거쳐 수백만 명의 민초들이 뛰어들어 보국안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세계사에서 일찍이 그 유례가 없는 최대이자 최고의 민중 운동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조직적 기반이 《용담유사》였던 것이다.
서(西)로 활짝 열린 동(東)
서학에 대립하는 동학 또는 서를 배척하는 동이 아니라 서(西)에 활짝 열린 동(東), 생명 또는 광명을 상징하는 동, 타자와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동으로서의 동학(東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제우는 말했다. “운즉일(運則一)이요 도즉동(道則同)이며 이즉비(理則非)라.” 즉 “시운은 하나요, 도는 같으며, 이치는 다르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요청으로서 서학이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나, 조선 땅에서 동학이 창도되어 널리 전파되는 것이나 시운은 똑같다는 것이다. 수운은 자신이 창도한 동학과 서양에서 들어온 서학이 같은 ‘시운’을 타고났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즉동(道則同)” 즉 도는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서학, 지금의 천주교가 추구하는 길이나 동학이 추구하는 길이 궁극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서학과 동학이 추구하는 ‘도(道)’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으로, 타종교에 대한 다원주의적 사고를 보여 준다.
그러나 수운은 “이즉비(理則非)”, 즉 이치는 다르다고 했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은 다른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도를 받았으므로 내가 만든 것을 어찌 서학이라고 할 수 있느냐? 동학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의 상황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 동시에, 나의 주체성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서학과 같은 타종교나 서양 문명과 같은 이질 문명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나는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타자를 향해 활짝 열려 있으면서도 자기 주체성을 갖는 것이 바로 동학인 것이다. 상대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충실하려는 것이 동학의 핵심 사상이다.
《용담유사》의 초판은 1881년 충청도 단양에서 목활자본으로 간행됐다. 현재 초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1982년 전주에서 발견된 계미중추판(癸未仲秋版), 즉 1883년 음력 8월에 ‘북접(北接)’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판본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이 책은 계미중추판을 저본으로 삼아 현대 한글로 바꾸었다. 또한 수운 최제우가 체포되어 순교 당하는 빌미가 되었던 〈검가〉[劍歌, 검결(劍訣)이라고도 한다]도 여러 이본(異本)을 비교·대조해 정본화(定本化)해서 수록했다.
* 동학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수운 최제우가 저술한 동학의 핵심 경전인 《동경대전》(박맹수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을 함께 읽어 보시면 좋습니다.
200자평
‘문명 개벽’ 사상으로서 1860년에 성립해, 34년간의 지하 포교 시대를 거친 끝에 수백만 명의 민초들이 뛰어들어 보국안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세계사에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최대의 민중 운동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혁명에 사상적, 조직적 기반을 제공했던 한글 가사 《용담유사》를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 계미중추판(1883)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했다. 또한 수운 최제우가 체포되어 순교당하는 빌미가 되었던 ‘칼 노래’ 〈검가(劍歌)〉를 최초로 정본화해 수록했다.
지은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1824년에 부친 근암 최옥과 모친 곡산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학문은 깊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몰락 양반 출신이었고 모친은 재가녀(再嫁女)였다. 당시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과거 중에서 문과에는 응시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수운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운은 부친의 두터운 사랑과 후광 덕분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특히 퇴계(退溪) 선생으로부터 부친 근암으로 이어진 퇴계학(退溪學)의 학풍을 충실히 계승하는 학문적 수련을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경제적 후원자였던 부친이 수운의 나이 17세 때인 1840년에 사거(死去)하자 그는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신세가 되었다. 유일한 버팀목이던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수운은 한가롭게 학문이나 하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집안 살림을 꾸려 가야 했고 가족들도 돌보아야 했다. 이에 수운은 한때는 무과(武科)에 응시하고자 무예를 익히다가 그만두었고, 또 한때는 경상도 남부 지방에서 나는 원철(原鐵) 도매상을 열어 생계를 도모하려다 망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가산은 거듭된 사업 실패로 다 날려 버렸으며 물려받은 집마저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20세 이후부터는 전국을 방랑하며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절치부심하며 구도 행각에 나섰다. 1855년에는 경상남도 양산(梁山)의 천성산(千聖山)에 있는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수련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얻고자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수운은 1859년 36세 되던 해에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10여 년간 지내 왔던 오랜 처가살이에 마침표를 찍고 고향 경주 용담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수운의 삶은 ‘소업교위(所業交違)’, 즉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하는 일마다 실패한’ 인생이었다. 이것이 바로 동학 창도 직전 수운의 자화상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해인 경신년(1860) 음력 4월 5일에 수운은 부친이 물려준 용담서사(龍潭書舍)에서 이상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몸이 몹시 떨리고 한기(寒氣)를 느끼는 가운데, 공중에서 무슨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일이라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의 주인공을 찾아 문답을 나누기 시작한다. 아무런 형체도 없이 공중에서 말씀하는 그 주인공은 바로 단군 이래 이 땅의 민중이 늘 마음으로 모시고 받들어 온 ‘하늘님’이었다. 수운 선생이 이날 하늘님과 문답을 나누며 ‘내림’, 즉 강령(降靈)을 체험한 과정은 동학의 한글 경전 《용담유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림 체험, 즉 강령 체험을 통해 수운은 하늘님으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 즉 천도(天道)를 받았다. 또 21자 주문(呪文)과 영부(靈符, 신령한 부적)도 함께 받았다. 하늘님은 특히 주문과 영부를 가지고 민중을 가르치면 스스로 장생할 뿐만 아니라 천하에 널리 덕을 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수운에게 포덕(布德, 포교와 같은 뜻)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수운은 아무리 믿으려 해도 내림 체험 과정에서 나타난 하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림 체험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하늘님이 말씀하신 내용대로 실행해 보면서 그 효과를 검증해 보기에 이른다. 1년여에 걸친 수련 결과, 과연 하늘님 말씀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이에 1861년 6월부터 수운은 동학의 가르침을 전하는 포덕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수운이 포덕을 시작하자마자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재해, 콜레라와 같은 괴질의 주기적 유행, 이양선(異樣船) 출몰과 천주교의 전파에서 오는 위기의식 등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민중은 ‘용담에서 신인이 났다’며 다투어 수운을 찾아와 나아갈 길을 묻기 시작했다. 수운이 동학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한 1861년 6월 이후 민중들은 동학으로 다투어 들어갔다. 그 결과 수운이 도를 펴고 있던 경주 용담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던’ 세상을 안타깝게 여기는 민중의 귀의처가 되었고, 수운은 그런 민중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신인(神人)이자 진인(眞人)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이 같은 민중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도리어 수운을 체포해 처형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수운은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이듬해 3월 10일에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 장대(將臺, 경상감영의 훈련장)에서 삿된 도로 민중을 현혹했다는 이른바 좌도난정(左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때 이른 죽음이자 가슴 아픈 죽음이었다. 이로써 수운은 동학을 창도한 지 4년 만에, 그리고 1861년 6월부터 정식으로 동학의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공적(公的) 생애를 죽음으로써 마감하기에 이른다.
옮긴이
박맹수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원광대학교 제13대 총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1955년 전남 벌교에서 출생했으며, 1979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ROTC 장교로 군 복무 도중 1980년 5월 광주를 겪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군 제대 후에 5월 광주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굴절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1983년 한국학대학원에 진학해 전국 각지에 소재한 동학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숨겨진 자료를 찾고 동학 후손들의 증언을 채록하는 등 이른바 ‘발로 쓰는’ 동학 연구에 매진, 1996년 동학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7월 일본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소속 후루카와 강당(古河講堂)에서 전라남도 진도 출신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이 100년 만에 ‘방치된’ 상태로 발견되는 사건을 계기로 도일(渡日), 1998년 홋카이도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 진학했으며 〈근대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동학사상,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을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2년부터는 ‘일본의 양심’으로 존경받았던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1929∼2023)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와 함께 ‘한일시민이 함께 동학농민군 전적지를 찾아가는 여행(이하, 한일동학기행)’을 조직해 2023년까지 매년 빠짐없이 시행함으로써 한일 양국의 양심적인 시민들과 우호와 교류 증진에 힘써 왔으며, 2023년 10월에는 한일동학기행의 결실로써 일본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전남 나주시에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의 비’를 세웠다.
대표 저서로는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모시는사람들, 2009),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동학농민혁명과 제국일본》(모시는사람들, 2011),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모시는사람들, 2014), 《개벽사상과 종교 공부》(공저, 창비, 2024), 《신판 동학농민전쟁과 일본》[공저, 일본 도쿄, 고분켄(高文硏), 2024], 《일본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근간, 모시는사람들) 등이 있다.
또한 번역서로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푸른역사, 2002), 《이단의 민중반란−동학과 갑오농민전쟁 그리고 조선 민중의 내셔널리즘》(역사비평사, 2008), 《동경대전》(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일본의 양심이 보는 현대일본의 역사인식》(모시는사람들, 2014) 등이 있다.
차례
교훈가(敎訓歌)
안심가(安心歌)
용담가(龍潭歌)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도덕가(道徳歌)
흥비가(興比歌)
검가(劍歌)
해설 : 동학의 길, 문명 개벽의 길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광대한 이 천지에 정처 없이 발정(發程)하니
울울한 이내 회포 불일 곳이 바이없어
청려(靑藜)를 벗을 삼아 여창(旅窓)에 몸을 비켜
전전반측(輾轉反側)하다가서 홀연히 생각하니
나도 또한 이 세상에 천은이 망극하여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받아 내어
구미용담 좋은 풍경 안빈낙도하다가서
불과 일 년 지낸 후에 원처근처(遠處近處) 어진 선비
풍운같이 모여드니 낙중우락(樂中又樂) 아닐런가
– <도수사(道修詞)> 중에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 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 〈검가(劍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