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유럽 중세의 개막에 대한 새로운 해석
18세기 이래 통용된 ‘전통적 학설’은 유럽 중세의 시작을 게르만족의 침입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설명해 왔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게르만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면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은 이 ‘전통적 학설’을 단호히 거부하고 유럽 중세의 개막을 새롭고 독창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른바 ‘피렌 테제’다.
‘피렌 테제’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중세는 게르만족 침입이 아니라 7세기 이슬람 침공 때문에 시작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은 고대 세계의 지중해적 통일성과 로마 문명의 본질적 특징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의 진출을 기점으로 동방과 서방이 최종적으로 분리되었고, 이슬람교도의 호수가 된 서지중해는 사상과 교역의 통로로서의 기능을 멈췄다. 생활의 축이 지중해에서 북방으로 옮겨짐에 따라 메로빙거 왕조가 쇠퇴하고 게르만적 북방에 기원을 둔 카롤링거 왕조가 탄생했다. 피렌은 이를 “마호메트가 없는 샤를마뉴는 상상할 수도 없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피렌 테제의 의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는 ‘피렌 테제‘를 집대성하는 저서로서 피렌 학문 세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그 내용을 둘러싸고 다양하고 무수한 논쟁이 벌어졌다. 피렌 이후 고고학을 비롯한 다양한 연구 방법, 그리고 체계적인 사료의 발굴과 연구 등으로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피렌의 독창적인 관점은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카롤링거 시대에 유럽의 중심이 지중해 지역에서 북부로 이동했다는 지적을 비롯한 그의 여러 주장들은 오늘날에도 설득력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서로마 제국 멸망부터 카롤링거 왕조 탄생까지의 사건, 사회경제적 상황, 지적 생활 등을 생생한 모습으로 접할 수 있다.
이 책은 앙리 피렌의 ≪Mahomet et Charlemagne≫(PUF, 2005)을 원전으로 삼아 전체의 약 35%에 달하는 분량을 발췌, 번역했다.
200자평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은 유럽 중세의 개막을 새롭고 독창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의 ‘피렌 테제’는 게르만족의 침입이 아니라 이슬람 침공을 중세의 기점으로 간주하며, 카롤링거 왕조의 탄생이 이슬람 침공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이 책은 피렌 테제를 집대성하는 저서이자 피렌 학문 세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마 제국 멸망부터 카롤링거 왕조 탄생까지의 사건, 사회경제적 상황, 지적 생활 등을 생생한 모습으로 접할 수 있다.
지은이
1862년 12월 22일 벨기에의 베르비에에서 태어났다. 리에주 대학교에 진학해 1883년에 중세 디낭을 주제로 하는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 해에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1885년 파리에서 국립 고문서 학교와 파리 고등 연구원에서 수학했다. 1886년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겐트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중세사와 벨기에 역사를 담당했으며, 1930년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이 대학에서 근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개인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피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14년 8월 3일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했고 그의 아들 피에르 피렌이 전사했다. 피렌은 독일 역사가 카를 람프레히트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람프레히트가 벨기에인들을 독일에 협력하게 하는 사업의 책임자가 되자 그와 절교했다. 독일군은 저명한 역사가인 피렌이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도록 했다. 그러나 피렌은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독일로 압송된 1916년부터 종전을 맞은 1918년까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동부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소련 병사들로부터 러시아어를 배우는 한편, 벨기에 포로들에게 벨기에의 역사를 가르쳤으며,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유럽의 역사≫를 집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학문적으로도 피렌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렌이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 독일군 장교가 왜 독일어를 잘하면서 프랑스어로 답변하는 것을 고집하느냐고 묻자, “나는 1914년 8월 3일 이후 독일어를 잊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1차 대전 이후 그는 ‘게르만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결정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점차 우연한 사건이나 개인의 역할 등에 중요성을 부여한 것도 1차 대전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저작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중세의 개막에 관한 것으로,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마호메트와 샤를마뉴≫다. 피렌은 생전에 자신의 손으로 이 책을 탈고하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 제자 베르코트랑이 아직 미완성 상태에 있는 각주 등을 보충한 뒤 그의 아들 자크 피렌이 1937년에 이 책을 출판했다. 둘째, 중세도시에 관한 것으로, 이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 ≪중세도시≫(1927)가 있다. 셋째,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자신의 모국 벨기에의 역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 ≪벨기에의 역사≫(7권, 1899∼1932)가 있다. 이외에 포로수용소에서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유럽의 역사≫(2권)가 손질을 거친 뒤 (기억에 의존해 썼기 때문에 연도 등은 대부분 괄호로 표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1956년에 뒤늦게 출판되었다.
옮긴이
강일휴는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를 졸업했으며(1981),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중세 프랑스 코뮌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1992).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수원대 명예교수이다. ≪서양 중세사 강의≫(공저, 2003)를 썼으며, 앙리 피렌의 ≪중세 유럽의 도시≫(1997), 조르주 뒤비의 ≪서기 천년≫(1999), 콘스탄스 브리텐 부셔의 ≪중세 프랑스의 귀족과 기사도≫(2005), 린 화이트의 ≪중세의 기술과 사회 변화≫(2005)를 번역했다. 주로 서양 중세도시와 중세 문화에 대해 연구했다.
차례
제1부 이슬람 침입 이전의 유럽
제1장 게르만족 침입 후 서유럽 세계에서 지중해 문명의 존속
1. 게르만족 침입 이전의 ‘로마 세계’
2. 게르만족 침입
3. ‘로마 세계’의 게르만족
4. 서방의 게르만족 국가들
5. 유스티니아누스(527∼585)
제2장 게르만족 침입 후 사회경제적 상황과 지중해 항해
1. 인신과 토지
2. 동방 세계와의 교류. 시리아인과 유대인
3. 내륙 상업
4. 화폐 및 화폐유통
제3장 게르만족 침입 후 지적 생활
1. 고대의 전통
2. 교회
3. 예술
4. 사회의 세속적 성격
결론
제2부 이슬람과 카롤링거 왕조
제1장 지중해에서 이슬람의 팽창
1. 이슬람의 침공
2. 서지중해의 폐쇄
3. 베네치아와 비잔티움
제2장 카롤링거가(家)의 쿠데타와 교황권의 방향 전환
1. 메로빙거 왕조의 쇠퇴
2. 카롤링거 궁재(宮宰)들
3. 이탈리아, 교황, 비잔티움. 교황권의 방향 전환
4. 새로운 제국
제3장 중세의 개막
1. 사회경제적 조직
2. 정치조직
3. 지적 문명
결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로마 제국의 가장 현저하고 근본적인 특징은 지중해적 성격이다. 로마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적이고 서부는 라틴적이었지만, 로마 제국 전체는 공통적으로 지중해적 성격을 띠었고, 그럼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했다. 로마인들이 ‘우리들의 바다’라고 부른 그 내해(內海)는 사상·종교·상품의 통로였다.
2.
게르만족보다 그 수가 많지 않았던 아랍인들이 게르만족과는 달리 정복한 문명 선진국의 주민들에 동화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한 가지다.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에 반대할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아랍인들은 새로운 종교에 의해 고무되었다. 그들의 동화를 막은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이것뿐이었다. 왜냐하면 종교 이외의 다른 분야들에서 아랍인들은 피정복민의 문명에 대해 게르만족과 마찬가지로 편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그런 문명에 자신들을 동화시켰다.
3.
그 어떤 것도 수 세기 동안 유지되었던 고대와 지중해 질서의 대변동을 샤를마뉴 제국의 탄생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내 주지는 않는다. 이 제국의 탄생은, 한편으로는 동방과 서방의 분리로 교황의 권위가 서유럽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의 에스파냐와 아프리카 정복으로 프랑크인의 왕이 기독교적인 서방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따라서 마호메트가 없는 샤를마뉴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