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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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장편 중 ≪죄와 벌≫, ≪백치≫를 잇는 세 번째 작품 ≪악령≫은 작가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과 더불어 정치적 사상가이자 묵시록적 예언가로서의 도스토옙스키의 면모가 상당히 부각되는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사상의 담지자(ideolog)라고 칭한 바흐친의 이론을 이만큼이나 잘 증명해 주는 작품도 드물 만큼 작품 속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 하나의 거대 이데올로기를 대표한다. ≪악령≫은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동안 괴롭혀 왔던 거대 사상들의 각축장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네차예프 사건의 커다란 플롯에서부터 살인 당시의 배경과 작은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악령≫으로 가져온다. 이렇게만 작품 ≪악령≫을 본다면 그것은 실재했던 사건의 소설화 또는 정치적인 팸플릿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악령≫은 표면적으로는 당대의 정치 이념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고 또 정치적 사상적 이슈를 다루는 내용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문화 예술적 가치를 담고 있는 담론이라기보다는 정치 팸플릿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정치적 팸플릿에 탁월한 심리 묘사와 종교적인 색채를 더해 담론을 예술적으로, 또 성경적이고 묵시론적으로 이끌어 간다.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은 살인과 폭력이 주요 사건으로 등장한다. ≪죄와 벌≫에는 전당포 노파와 백치 같은 그녀의 이복동생이, ≪백치≫에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소유자 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마지막 장편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아버지 카라마조프가 살해된다. 그러나 ≪악령≫의 세계에는 나머지 세 작품을 다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스타브로긴, 샤토프, 키릴로프 등 주요한 사상의 담지자들뿐만이 아니라, 레뱌트킨, 그의 절름발이 백치 여동생 마리야 레뱌트키나, 그들의 하녀, 또 아름다운 리자베타의 죽음이 등장한다. 죽음의 퍼레이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리야 샤토바와 그녀가 갓 나은 사내아이, 유형수 페디카와 그가 죽인 사람들, 심지어 키릴로프의 옆방에 살던 노파나 며느리 등 부수적인 인물들도 모두 죽는다. ≪악령≫에는 운명의 뮤즈이자 일상을 돌보며 라스콜리니코프를 부활로 이끈 정신적인 길잡이 소냐라는 존재도, 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정신적 아름다움의 체현인 미시킨 공작도, 12인의 어린 사도를 데리고 세상에 빛을 가져다줄 알료샤 카라마조프도 없다. 결국 음모, 살인, 자살, 방화가 가득한 이 ≪악령≫의 세계는 피비린내로 범벅이 된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불행 덕택에 미화되나 ≪악령≫에서의 비극은 승화를 위한 깊이를 결여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소위 혁명적이라는 모든 인물들은 희화되며, 매섭게 몰아붙이지도 않고 그럴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되는 듯 시종일관 조롱조로 그려진다. 그들의 음모도 죽음도, 모두 깊이를 결여한다. 그들은 그저 악령에 씐 돼지 떼처럼 죽는다. 작중 어느 인물도 이 세계를 구원해 낼 힘이 없다. 지옥은 딴 곳이 아니라 신이 없는 바로 이 세상임을 보여 준다.
종교를 얘기할 때, 도스토옙스키의 문제는 신의 존재 유무가 아니다. 그보다는 신이 존재함으로써 인간에게 일어나는 문제다. 인간과 신의 문제다. 또 악과 무죄한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인류 보편적 고통을 종교적으로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가난한 이의 피를 빨아먹는 이[虱]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여 그 돈으로 다른 수천의 사람을 돕는 것을 과연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라스콜리니코프, 죄 없는 아이들의 고통과 자유 의지와 신의 뜻에 관한 문제로 고뇌하는 이반, 역시 모두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지적이고 논쟁하는 자아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그의 종교 철학적 해결은 단순하다. 심판하지 말라, 책하지 말라를 전제로 한 살아 숨 쉬는 인간에 대한 능동적인 사랑이다. 개인성의 존재론적 인성은 신과 얼마나 가까워지는가, 신과의 거리 줄이기가 관건이며, 신과의 연결이 끊어진 인간, 신과 멀어진 인간은 그의 오만으로 인해 고독해지고, 죄를 범하게 되고, 그 죄로 인해 타인을 파괴하고 자신도 자멸한다는 진리를 전한다. 서구의 과학적 합리성과 이성의 잣대로는 신에게로 다가갈 수 없고, 신의 계획을 가늠할 수도 없다. 합리성과 이성, 과학을 초월하는 러시아적 형제애,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 같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사랑만이 인간이 신에 가까워지는 길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악령≫은 인간 정신의 제 문제들−선과 악의 문제, 빈과 부의 문제, 사랑과 희생의 문제, 고통과 구원의 문제, 그리고 유럽과 러시아의 문제, 모든 사상적인 문제들을 종교적 문제로 치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묵시론적 시각을 많이 드러낸다.
도스토옙스키는 사회 일반의 문제를 보여 주며, 그 표면을 들추어내어 문제의 근원까지 파헤쳐 내려간다. 전혀 다른 소재의 실들이 씨실과 날실로 교차해 복잡다단하게 짜인 아름다운 트위드 소재를 만들어 내듯, 작가는 사회 심리학적인 문제는 그 근간이 윤리 종교적인 문제에 있음을 보여 주며, 이런 제반 문제를 문학적인 텍스트로 버무려 내어 위대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다. 도스토옙스키의 지적 성찰과 이론적 구성을 위한 기초에는 언제나 종교적인 탐구가 있다. 종교적 제 문제들을 정치, 윤리, 미학, 역사, 철학적인 문맥 속에서 전개해 나갈 뿐만 아니라 좋은 소설가는 훌륭한 심리학자라는 말이 있듯 인물 하나하나의 심리 묘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훌륭한 작가의 어렵고 복잡하나 위대한 작품이다.
200자평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중 가장 정치적이고 가장 사상적이며 가장 묵시론적인, 그래서 가장 어렵다고 평하는 작품. 개인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무신론, 물질 만능주의… 작가의 눈에는 이 모든 서구 사상이야말로 러시아를 병들게 하는 악령이었다. 가장 중요한 10%의 장면, 그리고 작품 속의 거대 사상과 정치적 담론, 종교 상징을 상세히 풀이하는 주석과 해설이 당신을 거장의 세계로 이끈다.
지은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던 사람이고,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이 끝난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그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모두 ≪러시아 통보≫에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28일,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사건들이 넘쳐 나는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접한 독자라면 베르댜예프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옮긴이
김정아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서울대학교 박사 과정 중 미국으로 유학 가서, 일리노이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슬라브어문학부 대학원에서 슬라브 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전공으로는 폴란드 문학을 공부했다. 박사 논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타난 숫자와 상징>이며, 다수의 소논문을 국내외 언론에 발표했고, 서울대학교 등에서 문학을 강의했다. 번역서로는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다닐 하름스, 청어람 미디어), ≪부실한 컨테이너≫(미하일 조셴코, 청어람 미디어), ≪되찾은 젊음≫(미하일 조셴코, 청어람 미디어), ≪지하 생활자의 수기≫(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카람진 단편집≫(니콜라이 카람진, 지식을만드는지식), ≪무엇을 할 것인가?≫(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가난한 사람들≫(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죽음의 집의 기록≫(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천줄읽기≫(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도박사 천줄읽기≫(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학대받고 모욕받은 사람들 천줄읽기≫(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미성년 천줄읽기≫(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 ≪온순한 여자/우스운 사람의 꿈≫(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원서발췌 죄와 벌≫(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원서발췌 백치≫(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식을만드는지식) 등이 있다. 저서로는 ≪패션 MD1 : 바잉편≫(알에이치코리아), ≪패션 MD2 : 브랜드편≫(21세기북스), ≪패션 MD3 : 쇼룸편≫(21세기북스), ≪모칠라 스토리≫(알에치코리아)가 있다. 20세기 소비에트 문학과 소비에트 여성의 문제, 그리고 유토피아 문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으며,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소비에트 시기 문학 작품의 번역을 준비하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부
제1장. 서언을 대신해 : 많은 존경을 받는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의 전기 중 몇 가지 상세한 이야기들
제2장. 해리 왕자. 혼담
제3장. 타인의 죄업
제4장. 절름발이 여자
제5장. 현명한 뱀
제2부
제1장. 밤
제2장. 밤(계속)
제3장. 결투
제4장. 모든 사람들의 기대
제5장. 축제를 앞두고
제6장. 분주히 돌아다니는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제7장. 우리 편
제8장. 이반 왕자
제9장.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를 수색, 압수하다
제10장. 해적, 숙명적인 아침
제3부
제1장. 축제의 1부
제2장. 축제의 끝
제3장. 끝장난 사랑 놀음
제4장. 최후의 결의
제5장. 여자 여행객
제6장. 바쁘고 성가신 밤
제7장. 스테판 트로피모비치의 최후의 순례
제8장 결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보시다시피 이건 바로 우리 러시아 그대로입니다. 병든 자로부터 나가 돼지 속으로 들어간 마귀들은 우리의 위대하고 사랑스런 병자, 말하자면 우리 러시아에 수백 년 동안 쌓이고 쌓인 모든 해악이며, 전염병이고, 모든 불결함이며 모든 크고 작은 악마입니다! 위, 세트 루시, 케제메 투주르. 그러나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의지는 위에서부터 러시아를 비춰 줄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모든 마귀들이 내쫓겼듯, 표면에서 곪아 터진 모든 불결하고 더러운 것들을 쫓아낼 것입니다… 그들은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스스로 빌게 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벌써 들어가 버렸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그리고 저들, 그리고 페트루샤도… 에 레 조트르 제베크 뤼. 어쩌면 나는 그중에 제일가는 마귀요 마귀의 두목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마귀에 씌어 미쳐서 질주하다가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몽땅 빠져 죽고 말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그 정도 가치밖에는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자는 치료되어, ‘예수의 발아래 앉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