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성천(星泉) 유달영(1911, 4, 8∼2004, 10, 27)은 우리 근대사에서 대표적인 농학자고 계몽적인 사회 운동가며 수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계몽적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은 양정고등학교 재학 시절 김교신으로부터 민족의식을 배우면서 깊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김교신이 주재하던 성서 연구회(聖書硏究會)에 참여해 김교신·함석헌 등과 조선의 독립 방략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쓴 김교신이 발간하던 기독교 민족주의 신앙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1942년 3월 제158호 권두언, 어떤 혹한에도 살아남는 민족의 희망을 개구리의 생명력을 빌어 노래한 <조와(弔蛙: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는 일제 검찰에 의해 ≪성서조선≫ 폐간의 빌미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1942년 6월 12일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함석헌, 송두영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그가 훗날 수원고농을 졸업한 뒤 개성의 명덕고등여학교(明德高等女學校)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벌인 것은 이러한 내력으로 볼 때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의 이러한 계몽적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이 문학적 글쓰기로 대중에게 다가간 계기는 김교신의 권유로, 심훈의 농촌 계몽 소설 ≪상록수≫ 속의 주인공인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의 전기 ≪최용신 소전≫(1939)을 출간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스스로 “나의 젊은 시절의 이 저서는 내가 이 나라 여성들에게 보내는 가장 뜨겁고 정성스러운 꽃다발”이라고 적고 있다. 그가 최용신의 봉사와 희생의 민족적 삶을 이 땅의 독자들에게 선양하기 위해 친전 편지 형식을 빌려 절절하게 쓰고 있는 것에서 보듯, 그의 글쓰기는 투철한 민족의식과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고취시키고 선도하기 위한 소명 의식이 배어 있다. 그는 주요 수필집으로 ≪유토피아의 원시림≫, ≪인간 발견≫, ≪흙과 사랑≫, ≪소심록≫,≪눈 속에서 잎 피는 나무≫, ≪유달영 인생론집≫ 등을 남겼다.
유달영 수필집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눈 속에서 잎 피는 나무≫ 중에 <생활을 밝히는 명상>을 통해 강조하는 인생론의 근간은 사람의 본업은 사람이라는 점을 절대 가치로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에겐 그의 직업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다. 직업의 종류가 결코 자신의 사람됨을 드러내는 표징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본업을 바르게 가꾸어 나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평범한 속에 인간의 본모습을 발견하며 신념으로 인간을 살아가는 일”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 자신을 성찰하며 바람직한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유달영 에세이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적 기조다. 실제로 그의 에세이는 인간 삶의 체험적 일상 속에서 그 일상을 넘어서는 지혜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목소리가 주조를 이룬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체험적 육성의 진정성과 호소력이 짙게 배어난다. 그의 에피그램적 글쓰기가 대중에게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배경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200자평
‘사람의 본업은 사람’이라는 명제 아래 계몽 사회 운동가로 평생을 살아온 유달영. 그는 수필에서도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론을 인생, 사랑, 신앙 등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시키며 설파한다. 그래서 그의 에세이의 잠언은 너무도 친숙하면서도 새삼스러운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일제 강점기의 어둠 속에서부터 민족의식 고취와 바람직한 삶의 태도론을 체험적 언어로 강변해 온 유달영의 계몽적 에세이는 오늘날 가치관의 혼돈과 상실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지속적인 삶의 이정표로서 지속적으로 의미를 지닌다.
지은이
유달영(1911∼2004)은 농촌 운동가며 교육자고 수필가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성천(星泉)이다. 죽림공립보통학교·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수원 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를 졸업했다. 1956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으며, 1972년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계몽적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은 양정고등학교 재학 시절 김교신으로부터 민족의식을 배우면서 깊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김교신이 주재하던 성서 연구회(聖書硏究會)에 참여해 김교신·함석헌 등과 조선의 독립 방략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1942년 3월 30일 잡지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글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弔蝸)>을 문제 삼은 일제에 의해 잡지는 폐간되고, 전국의 독자 300여 명이 일제히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김교신·함석헌·송두용 등 13명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만 1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3월 29일 석방되었다. 1945년 8·15 광복 후 식량 자족 운동·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쳤다.
그의 계몽적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이 문학적 글쓰기로 대중에게 다가간 계기는 김교신의 권유로, 심훈의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 속의 주인공인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의 전기 ≪최용신 소전≫(1939)을 출간하면서부터다. 그는 스스로 “나의 젊은 시절의 이 저서는 내가 이 나라 여성들에게 보내는 가장 뜨겁고 정성스러운 꽃다발”이라고 적고 있다.
1959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2년 전국 농업 기술자 협회 총재·서울대학교 교수 협의회 회장, 1974년 국토 통일원(현 통일부) 고문, 1975년 원예학회 회장·4H클럽 명예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78년 한국 유기 자연 농업 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80년대 이후부터 대한민국 국정 자문위원·인간 교육원 회장·대한 적십자 봉사회 중앙 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성천(星泉) 문화재단을 창립해 이사장을 지냈다. 건국대학교 상허 문화재단 이사장·조만식 선생 기념 사업회 이사·한국 NGO 지도자 총연합 고문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는 ≪새 역사를 위하여≫·≪유토피아의 원시림≫·≪인생 노우트≫·≪흙과 사랑≫·≪류달영 인생논집≫ 등과 자서전 ≪소중한 만남≫·≪만남의 인생≫ 등이 있다.
엮은이
홍용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젊은 평론가상, 애지문학상, 시와시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연구서 ≪김지하문학연구≫, 평론집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등이 있다.
차례
제1부 生活을 밝히는 瞑想
살아간다는 意味
사랑의 理解
信仰의 書
참다운 敎育
干城에 대하여
흙에서 사는 知慧
제2부 별은 흐르고 빛은 남고
偉大한 實踐家
다미엔의 빛
仁村의 敎訓
꺼지지 않는 별
이토록 거룩한 生涯
民族愛의 꽃
巨星
어느 開拓者
神의 奇蹟
無抵抗의 抵抗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코펜하겐 왕궁 앞에서 七八 세 되는 노인과 이야기하다가 덴마아크 사람들이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지나가는 말에 한 일이 있다. 그는 ‘제 밑천 없는 놈이 대개 남의 말을 잘들 하죠’ 하며 쓴웃음을 웃었다. 일어(日語)는 국적을 분별할 수 없도록 잘했고 영어는 미인들 볼 쥐어지르게 못하는 것이 한사인데, 한글 철자법은 엉망이어도 거리낌이 없다. 어떻게 식민지 굴레를 벗겠는가? 이 노인의 말은 허튼말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意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