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50년대의 이호철 소설들이 실향 체험을 바탕으로 전후 사회의 우울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포착했다면 1960년대 이후의 소설들은 소시민적 일상과 세태 풍자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더불어 분단의 삶에 대한 작가의 섬세한 시선은 개인의 삶과 역사를 연결하는 소설적 성과로 나타났다. 월남민으로 작가가 겪은 삶의 곤경은 소설 인물들이 보여 주는 좌절과 회의, 그리고 그것을 견디고 일어서는 생존의 의지와 비판적 통찰을 보여 준다. 월남 체험을 다룬 초기 소설들의 세계가 다분히 감상적이면서 서정적인 측면을 보여 준다면 19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소설들에 드러나는 것은 개인의 세태 일상을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객관화된 시선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분단 현실과 근대화 과정의 연관 관계를 섬세하고도 면밀하게 추적하는 이호철 소설의 특징이 분명하게 나타난 작품 중 하나가 <판문점>이다. 판문점에서 벌어지는 남북 교류의 과정에 기자의 자격을 빌려 참여한 주인공의 시선을 세심하게 드러낸 이 소설은 분단 소재 소설로도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여기서 전쟁과 분단 체험에 드리워진 주관적인 기억을 벗어나 객관적이면서 비판적인 성찰의 시선을 보여 준다.
<닳아지는 살들>에서도 분단과 이산의 체험은 한 가족의 기억 속에 자리한 희미한 상흔으로 남아 있다. 하룻밤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벌어지는 한 가족의 에피소드를 담은 이 소설은 부조리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화법을 쓰고 있다. 결혼해서 북으로 간 장녀가 밤 12시에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온 가족이 무기력한 상태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돌아오지 않는 장녀의 자리는 이산가족의 현실을 비유하며, 분단의 상흔을 알려 준다.
분단 이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는 <부시장 부임지로 안 가다>에서도 드러난다. 군사정권의 폭력성과 더불어 타락한 지도층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는 이 작품은 부패한 권력층에 주인공 스스로도 합류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1970년에 발표된 <큰 산>에서는 소시민 의식을 바탕으로 한 세태 풍자가 나타난다. 이 작품은 이호철 소설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 의식을 담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고향 회귀 의식, 혹은 분단 현실을 넘어서는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희미하게 드러낸다.
200자평
소시민적 이기주의와 물신주의, 타락한 정치 현실, 분단 문제 등 이호철 소설이 아우르는 현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당면한 제반 모순을 담고 있다. 분단 현실과 소시민적 일상성의 비판적 묘사는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회 모순이 개인의 일상에 어떠한 형태로 스며들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지은이
이호철(李浩哲)은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50년 6·25전쟁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울진까지 내려와 국군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고 12월에 월남해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부산에서 부두 노동자, 제면소 조수, 미군 부대 경비원 등을 하며 힘겹게 생계를 이어 갔다. 이 시절 실향민으로서 남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삶의 척박함과 치열한 생존 의식은 그의 소설의 원체험으로 자리하게 된다.
1953년 서울로 와서 황순원의 지도를 받으며 소설 창작을 하다가 1955년, 1956년 ≪문학예술≫에 단편 <탈향>과 <나상>이 각각 추천되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1년<판문점>으로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고 1962년 <닳아지는 살들>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6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으로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와 함께 재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73년 1월에 방문작가단의 일원으로 고은, 최인훈, 최인호 등과 함께 베트남을 방문했으며, 1974년 ‘문인 간첩단 사건’으로,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각각 옥고를 치렀다.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 취임했으며 1987년 ‘4·13 조치’에 대한 ‘문학 194인의 견해’ 발표를 주도했다. 1989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고 1992년 예술원 위원에 추천받았으며 연작소설 ≪남녘 사람 북녘 사람≫으로 제4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4년 7월 1일에 독일어로 번역된 ≪남녘 사람 북녘 사람≫으로 독일 예나의 프리드리히 실러대(예나대)가 주관하는 프리드리히 실러 메달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출간된 소설집은 ≪이단자≫(창작과비평사, 1976), ≪소슬한 밤의 이야기≫(청아, 1991), ≪큰 산≫(정음사, 1972), ≪닳아지는 살들≫(삼중당, 1975), ≪남녘 사람 북녘 사람≫(프리미엄북스, 1996), ≪이산타령 친족타령≫(창비, 2001)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과 전집으로 ≪소시민≫(삼중당, 1972), ≪서울은 만원이다≫(삼성출판사, 1972), ≪남풍 북풍≫(현암사, 1977), ≪문≫(민음사, 1981),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2009, 중앙북스), ≪이호철 전집 1∼7≫(청계연구소, 1988∼1991) 등이 있다. 저작으로는 ≪세기말의 사상 기행≫(민음사, 1993), ≪산 울리는 소리≫(정우사, 1994), ≪이호철의 소설 창작 강의≫(정우사, 1997), ≪희망의 거처≫(미래사, 1994), ≪문단골 사람들≫(프리미엄북스, 1997) 등이 있다.
엮은이
백지연(白智延)은 1970년 서울에서 출생해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면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2017년 18회 젊은평론가상을 수상했으며, 평론집으로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창비, 2001), 공저로 ≪페미니즘 문학비평≫(김경수 편, 프레스21, 2000), ≪20세기 한국소설≫(최원식 외, 창비, 2005) ≪한국문학과 민주주의≫(함돈균 외, 소명출판, 2013)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와 서울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판문점(板門店)
닳아지는 살들
부시장(副市長) 부임지(赴任地)로 안 가다
큰 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판문점은 분명 ‘板門店’이었다. 그리고 해괴망칙한 잡물이었다. 이를테면 사람으로 치면 가슴팍에 난 부스럼과 같은 것이었다. 부스럼은 부스럼인데 별반 아프지 않은 부스럼이다. 아프지 않은 원인은 부스럼을 지닌 사람이 좀 덜 됐다, 불감증이다, 어리숙하다, 그런 말씀이다.
-<판문점(板門店)> 53쪽
봄엔 봉우리부터 여드러워지고 겨울이면 흰색으로 험준해진다. 가을에는 침착하게 물러앉고, 여름이면 더 높아 보인다. 그 ‘큰 산’ 쪽으로 마파람이 불면 비가 왔고, ‘큰 산’ 쪽에서 바다 쪽으로 샛바람이 불면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였다. 그 ‘큰 산’은 늘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형태 없는 넉넉함으로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그 ‘큰 산’이 그곳에 그렇게 그 모습으로 뿌리 깊게 웅거(雄據)해 있다는 것이, 우리들 존재의 어떤 근원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깊숙하게 늘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아, 그 ‘큰 산’, ‘큰 산’.
-<큰 산> 162∼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