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수필 <산정무한>은 일반인들에게 필자 정비석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하겠다. 신문 연재 당시부터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던 그의 소설 ≪자유부인≫(1954)이 던진 충격파가 너무도 강렬했기에, 그의 이름 뒤에는 으레 대중소설가, 통속소설가라는 명칭이 따라붙곤 했다. 그러나 수필가로서의 그가 남긴 글들은 이러한 대중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단지 일면의 진실일 뿐이라는 사실을 적시해 주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그가 쓴 <어머니·마누라·며느리>나 <노인찬> 등 수필류의 글들을 훑어보면 의식 내면에 꽤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질서에 대한 감각도 아울러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런 사실만으로 곧장 그가 의도적으로 글의 종류에 따라 다른 성격의 글을 썼다고 단정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수필이란 어차피 내면 의식과 정서를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는 양식인 까닭에 그 공간 속에서 소설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을 펼칠 기회나 여유를 얻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의 이해처럼 그는 분명 상업성에 바탕을 둔 대중소설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에 앞서 예술성과 교양, 지적 수준을 겸비한 전문 문필가의 한 사람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소설가나 시인이 수필을 쓸 경우, 창작 활동 틈틈이 짬을 내어 쓴 여기(餘技) 정도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비석의 경우 소설 창작에 들인 공만큼이나 수필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흔적이 글 곳곳에서 드러난다. 문장의 정확성이나 자연스러움은 물론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당연한 의무겠지만, 그의 수필에는 독자들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간직되어 있다. 그러한 분위기는 대체로 특유의 감각적인 비유 및 수사법의 활용과, 효과적인 단절과 비약을 통해 글의 흐름과 방향을 조절할 줄 아는 문체론적인 효과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 그의 글은 수필로서 지녀야 할 제반 요소들을 망라한 교과서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00자평
‘소설은 독자들에게 읽히도록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가는 재미있게 써야 한다’라고 말한 정비석의 지론은 수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특유의 감각적인 비유와 수사법 활용, 효과적인 단절과 비약을 통해 글의 흐름과 방향을 조절하는 그의 수필은 독자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지은이
정비석(鄭飛石)은 1911년 5월 21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10월 19일 서울 용산구의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본명은 서죽(瑞竹)이다. 활동 초기에 한때 비석생(飛石生), 남촌(南村) 등의 필명을 사용한 바 있다. 주된 필명으로 굳어진 ‘비석’은 선배 작가인 김동인이 지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학 재학 시절이었던 1929년 무렵 ‘신의주고보 생도 사건’으로 피체되어 1년여의 영어 생활 끝에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에 있는 일본대학 예과로 진학하면서 문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대학 재학 중에 좌익계인 ≪프롤레타리아신문≫에 일어로 쓴 편지체 단편소설인 <조선의 어린이로부터>를 투고해 당선된 바 있다. 1932년경 학자금을 대 주던 큰형이 집안에서 희망하던 법과나 의과가 아닌 문과로 진학했음을 뒤늦게 알고 학비 지원을 중단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이후 문필 활동은 1935년 1월 ≪매일신보≫에 콩트 <여자>, 7월 ≪조선문단≫에 시 <도회인에게>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한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졸곡제>가 가작에, 이듬해인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는 단편소설 <성황당>이 장원에 당선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1940년 친일지인 ≪매일신보≫와 1945년 해방 직후 중도 계열인 ≪중앙신문≫ 문화부장으로 잠시 동안 언론계에서 활동한 것을 제외한다면 거의 평생을 전업 작가로 생활했다. 평소 그는 글은 재미있어야 하며, 작가라면 독자들에게 읽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이를 자신의 창작 과정에 있어서도 그대로 실천했다. 등단 이후 70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원고를 작성할 정도로 왕성한 창작욕을 보였으며, 생전에 80여 권의 소설집과 몇 권의 수필집 등을 남긴 바 있다.
소설가로서 그는 해방 이전에는 몇몇 친일적인 성향의 작품들과 더불어 이상과 현실과의 갈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시기의 특성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는 <저기압(低氣壓)>(1938), <삼대>(1930), <귀불귀(歸不歸)>(1939), <고고(孤高)>(1940) 등을 들 수 있다. 해방 이후에는 대중소설 ≪자유부인≫(1954)을 신문지상에 연재하면서 우리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으며, 이와 더불어 당시 서울법대 교수인 황산덕과의 논쟁은 소설 이상의 화젯거리를 낳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장편 역사소설에 주력하여 ≪명기열전≫(1977), ≪손자병법≫(1983), ≪초한지≫(1984), ≪연산군≫(1984), ≪삼국지≫(1985) 등을 저술했다.
소설 이외에도 문학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 준 것은 그가 쓴 수필이다. 특히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글 <산정무한>은 한글 수필의 대명사로 청소년들과 일반 대중에게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그의 기행문들은 고사와 야사의 적절한 인용과 함께 풍부한 독서 체험에 바탕을 둔 지적 인상과 상상력의 조화, 단절과 비약의 절묘한 활용을 통한 여운의 묘미 등 기행의 여정(旅情)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명문으로 평가받는다. 수필집으로는 ≪산정무한≫(1963)(동일 출판사에서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동시 출간된 바 있음)과 ≪살아가며 생각하며≫(1979)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산정무한≫은 그의 소설만큼이나 많이 팔린 수필집으로 기록되고 있다.
엮은이
김유중(金裕中)은 1965년 3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이후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현대문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군 복무 중이던 1991년, ≪현대문학≫지의 신인 평론 추천으로 등단했다. 석사 졸업 후 잠깐 동안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과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으며, 이후 육군사관학교와 건양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금까지의 저서로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세계관과 역사의식≫(태학사, 1996), ≪김기림≫(문학세계사, 1996), ≪김광균≫(건국대출판부, 2000), ≪한국 모더니즘 문학과 그 주변≫(푸른사상, 2006), ≪김수영과 하이데거≫(민음사, 2007) 등이 있으며, 편저서로 경북대 김주현 교수와 공동 편집한 ≪그리운 그 이름, 이상≫(지식산업사, 2004)이 있다. 현재 한국 현대시의 존재론적 탐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컴퓨터 게임이 지닌 구조와 특성을 인문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이해해 보려는 융합학문적인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차례
山情無限
造化無窮
喜方寺 行 道中記
紅島의 海女
耽羅 風光
가야 할 山河−金剛山
나의 고향
得春記
눈[雪]의 追憶
어머니·마누라·며누리
老人讚
나의 文學靑年 時節
自由夫人 秘話
‘정지용 시 특집’이 남긴 비화
이광수에 대한 세평(世評)
무애와 노산의 놀라운 기억력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겨울이 백 년같이 긴 고장이었다.
밤마을 놀이는 겨울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었다.
질화로를 끼고 등잔 아래들 둘러앉아 마을군들은, 제각기 돌아가며 옛말 추렴을 해 가는 것이었다. 구미호(九尾狐)가 꽃같이 예쁜 색시로 변해서 남의 집 귀동자(貴童子)를 호려다가 간(肝)을 빼먹었다는 무시무시한 옛말을 듣고는, 밖에 오줌 싸려도 못 나가고 쩔쩔매다가 기어코 어른들의 웃음거리가 되면서 주발에다 대고 오줌을 싼 것도 그런 밤의 일이었다.
효녀 심청이 이야기도, 열녀 춘향의 이야기도, 유관장(劉關張) 삼 형제의 이야기도, 모두 그런 밤에 얻어들은 지식이었다.
<흙눈[雪]의 追憶>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