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나라에 서구식 근대무용을 도입한 신무용의 개척자 조택원 회고록. 1927년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 공연에 매료된 조택원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작정 도쿄에 유학, 모질고 쓰라린 방랑의 한 평생을 시작한다. 전설의 무희로 알려진 최승희와 함께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된 그는 일찍이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문화를 직접 체험하며 한국 춤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한국 춤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193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우리의 신명을 세계에 떨친 그의 삶은 지금으로서도 놀라움 그 자체다. 일제 강점기에 세계를 떠돌며 수백 회의 공연을 통해 한국 춤을 알린 ‘춤의 선구자’조택원의 삶과 사랑.
지은이
1907년 함경도 함흥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보통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옮겨와 휘문고보,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했다. 휘문고보 시절부터 정구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보성전문 졸업 후에는 상업은행에 취직, 정구 선수로 계속 이름을 날렸다.
1927년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신무용 공연에 매료되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작정 도쿄에 유학, 최승희와 함께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었다. 1932년 귀국해 조택원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이듬해부터 자신이 창작한 신무용 공연을 펼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승무의 인상>, <만종>, <포엠> 등이 당시의 주요 작품이다.1937년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의 예술문화를 직접 체험하며 활동 영역을 세계무대로 넓혔고, 외국생활을 통해 전통적인 한국 춤의 소중함을 깨달아 한국 춤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해방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현대무용의 거장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미국 순회공연을 가지며 한국 춤을 알렸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3년간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과 유럽 각지를 떠돌며 400여 회의 크고 작은 공연을 했다. 1960년 귀국해서는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한국 무용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1976년 6월 69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춤은 여성적 섬세함과 서정성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고, 밝은 분위기로 관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주요 작품으로 <가사호접>, <신노심불로>, <학>, <부여회상곡>, <춘향전> 등이 있다.
목록
01 순수의 시대
군수와 춤추던 아이 3
교장이 던져준 하얀 꾸러미 8
체체카 트레파크 고파크 14
이시이 바쿠에 사로잡혀 19
두 번의 혼담 25
무작정 도쿄행 29
잊을 수 없는 여인 37
무용 천재 최승희 41
외로운 결혼식 48
장인과의 갈등 57
02 몽파르나스의 조선 무용가
빈털터리 3등 선객 65
파리의 친구들 70
캄캄해진 앞길 73
야마타 여사와 뮤제 기메 79
다혈질의 식민지 청년 85
스기무라 대사 90
거장의 무대 95
리파르의 충고 100
타바랑의 유혹 105
03 성공과 실패의 아이러니
공연에 미쳐 111
여배우 김소영 115
끈질긴 설득 120
≪조광≫의 오보 124
야심작의 실패 127
징용당한 공연 131
평생 친구 후나타 136
몽양의 서신 141
하지 장군의 대답 146
04 유랑의 시작
이 박사와의 불화 153
하와이의 100일 158
뉴욕을 매료시킨 <신노심불로> 162
샹카르와 대담 167
껍질로 남은 결혼 172
하와이의 옛 친구 176
꿈같은 제이콥스 필로 180
한솥밥의 정리 184
05 천하태평 아티스트
삼 형제의 환대 189
영친왕의 한숨 194
힘들었던 유럽행 199
급조된 공연단 203
헬싱키의 뱃노래 207
호탕한 하루살이 210
프랑스 전국을 돌다 214
트레 트레 비앵! 219
하늘이 준 파트너 오자와 준코 223
마력의 안나 리카르다 228
런던의 일주일 232
세 번째 프랑스행 235
로누 신부의 미소 240
14년 만의 귀국 244
책속으로
이 때문에 서울에서는 터무니없는 소문도 났다. “조택원이 최승희에 반해 도쿄로 갔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할아버지에게는 이시이 씨 댁에 짐을 풀고 난 뒤 “저는 손자 자격이 없습니다. 죽은 자식으로 생각하고 찾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편지를 썼고 홍원에 계시는 어머니에게도 도쿄에 간 후에야 편지로 알렸다. – 본문 30쪽
이날 최승희는 이시이바쿠무용연구소를 떠난 후 처음으로 내 춤을 구경했다. 그러고는 우리끼리의 불문율을 깨고 춤 이야기를 했다. “그 옛날에도 그런 걸 느낀 기억이 나지만 지금 보니까 당신 춤에는 소곤소곤 귓속말로 들려주는 듯한 이야기가 들어 있어. 그게 좋아.” – 본문135쪽
뉴욕의 최초 공연은 1949년 2월 10일 자연사박물관 강당에서 가졌다. 이 공연은 나의 미국 공연에 뚜렷한 금을 그은 기념할 만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나는 오랜만의 신작 레퍼터리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새 작품 <신노심불로>는 그 후 뉴욕에서만도 200여 회를 가진 내 공연에서 뺄 수 없는 주요 레퍼터리가 되었다. – 본문 164쪽
호텔 주인 내외는 다음 날 아침 내 방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이었다.
“어제 공연, 정말로 잘 봤습니다. 그런 굉장한 곳에서의 그런 훌륭한 공연은 50 평생에 처음입니다. 엊저녁의 그 영광은 저희가 100 살을 살아도 잊히지 않을 겁니다. 그 영광을 주신 보답으로 오늘로 약속해 주신 방값을 받지 않겠습니다. 언제든지 선생님이 파리를 떠나시는 날 주십시오.” – 본문 219쪽
돌이켜보면 대단한 천품을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나는 반세기 동안을 집시모양 한국 춤을 추면서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외롭고 쓰라리고 아득한 길이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험난하고도 고된 길이다. 내기 50년의 고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고됨을 씻어 주는 관중의 갈채와 친구들의 이해 덕분이었다. -본문 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