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기시다 구니오는 일본 근대 연극의 창시자,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이름을 딴 ‘기시다구니오희곡상’은 연극계 신진 작가 등용문으로, 일본뿐 아니라 일본 연극,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매해 주목하는 상이다. 시바 유키오, 히라타 오리자, 유미리, 정의신 등 ‘기시다구니오희곡상’ 수상 작가와 작품들은 이미 국내에도 소개되어 활발히 출판, 공연 중이다. 하지만 기시다 구니오에 대한 소개는 전무했다. 이번 출판으로 기시다 구니오와 대표작을 처음 한국에 소개한다. 한일 양국이 각각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일한연극교류센터를 설립해 희곡집 출간 및 공연으로 일본에 한국 연극을, 한국에 일본 연극을 소개한 지 20년 만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기시다 구니오
군인이던 아버지 영향으로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했던 기시다 구니오는 군대 생활에 염증을 느껴 휴직계를 제출하고 도쿄로 상경, 1917년 28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동경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다 프랑스 연극에 관심을 갖고 파리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프랑스 연극은 물론 파리를 거쳐 간 세계 유수 극단들의 작업에 영향을 받는다. 귀국 후 192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지면에 활발히 발표하며 주목받는다. 특히 부부의 일상 대화로 이루어진 스케치극 〈종이풍선〉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경쾌한 대사를 통해 인물의 심리 변화를 묘사한 〈종이풍선〉을 두고 일본 연극의 새로운 조류가 시작되었다는 반응이었다. 기시다 구니오의 이른바 스케치풍 연극에 대해 당시에는 “경박하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극적 사건이나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고, 평범한 대화만으로 극을 구성한 점이 100년 전 희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다.
〈종이풍선〉이 전에 없던 스타일로 일본 연극계에 충격을 안긴 희곡이라면, 〈옥상 정원〉은 당시 일본 사회상을 반영한 기시다 구니오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다이쇼 시대 도쿄 긴자 마츠야 백화점 9층 옥상이 배경이다. 그 무렵 《도쿄니치니치 신문》(《마이니치 신문》 전신)에 이런 기사가 났다.
마츠야 9층 망루에서 뛰어내리는 참사
행락 대낮 번화가에서 실업 청년이 아버지와 형을 원망하며 9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고층 빌딩에서 벌어진 최초의 투신자살이다.
기시다 구니오는 〈옥상 정면〉 초반에 이 사건을 언급하며 창작 배경을 암시했다. 성공한 사업가와 실패한 예술가인 두 친구가 고급 백화점 옥상 정원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에는 허례허식, 허영과 질투, 욕심, 자격지심이 빼곡하다. 이처럼 1920년대 일본 내 심화되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소개로 하면서 기시다 구니오는 두 인물의 갈등을 빈부 혹은 선악 갈등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들의 갈등은 상반된 사회적 지위 외에 다양한 요인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다. 상대를 향한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가 은근히 배어나는 두 친구의 대화는 지금 나와 내 이웃, 친구의 이야기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토록 중요한 작가의 이토록 현대적이고 재밌는 작품들이 왜 이제야 우리나라에 소개된 걸까? 번역을 맡은 ‘연극UNIT 世輪프로듀스’ 대표이자 연극 연출가인 임세륜은 기시다 구니오의 과거 행적이 이유가 되진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군부에 이동형 연극단 운영을 제안하고 위원회를 꾸려 이동극단을 이끌었던 것이다. 기시다 구니오의 이런 행보를 후대는 냉정하게 평가한다. 그럼에도 기시다 구니오가 권선징악을 주요 주제로 삼는 가부키, 신파 등 전통극이 주를 이루던 일본 연극계에 인간 심리와 생활을 묘사하는 일본식 희곡 작법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이를 성공적으로 무대화한 최초의 극작가라는 점은 대부분 인정한다. 젊은 극작가 육성을 목적으로 제정된 일본 내 가장 권위 있는 희곡상에 ‘기시다 구니오’의 이름을 쓰게 된 이유다.
200자평
기시다 구니오는 가부키와 신파가 주를 이루던 1920년대 일본 연극계에 인간 심리와 생활을 다룬 최초의 희곡들로 새바람을 일으켰다. 후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동조한 행보를 냉정히 평가하면서도 일본 근대 연극의 기틀을 다진 기시다 구니오의 공로를 인정해 신진 극작가에게 최고 영예인 ‘기시다구니오희곡상’을 제정했다. ‘기시다구니오희곡상’ 수상 작가와 작품은 출판, 공연을 통해 활발히 소개되어 온 반면 기시다 구니오와 그의 작품들이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한일 연극 교류 20년 만에 처음이다.
지은이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 1890∼1954)
일본의 극작가, 연출가, 소설가, 번역가, 평론가 등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일본 연극계에서는 일본 근대극(新劇)의 창시자, 근대 희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와카야마현 사무라이 계급 후손이었던 부친 뜻에 따라 1904년 15세 나이로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07년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장자크 루소, 샤토브리앙 등 프랑스 문학에 흥미를 느낌과 동시에 군대 생활에 대한 염증과 반발로 탈영을 시도하거나 일부러 시험에 백지를 내기도 한다.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지만 1914년 독일전쟁 사단 동원령을 계기로 군대 생활에 더더욱 염증을 느끼게 되면서 휴직계를 제출하고 도쿄로 상경해 1917년 28세에 동경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한다. 1919년 8월, 프랑스 연극에 관심을 갖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파리 주재 일본대사관, 국제연맹사무국에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프랑스 연극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소르본대학 르퐁 교수 소개로 자크 코포를 만나 그가 대표로 있는 뷔에콜롱비에 소극장에서 연극을 배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급히 귀국한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썼던 〈노란 얼굴의 미소〉를 고쳐 1924년 〈낡은 장난감〉이라는 제목으로 《엔게키신쵸(演劇新潮)》지 3월호에 발표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유럽 알프스산맥 동부 지역 티롤의 어느 호텔에서 만난 일본인과 국적 불명 외국인의 격정적 사랑 이야기인 〈티롤의 가을〉, 1925년에는 일요일 오후 신혼부부의 일상 대화로 이루어진 스케치극 〈종이풍선〉 등을 발표하면서 말의 뉘앙스를 중시했던 프랑스풍 심리극의 독특한 분위기로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새로운 조류를 몰고 온 신진 극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1929년 오사나이 가오루가 죽자 그가 이끌던 일본 근대 연극의 산실 축지 소극장이 해산된다. 이때부터 기시다 구니오는 일본 근대극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다. 《비극희극》, 《극작》 등의 연극 잡지를 펴내며 다나카 센카오(田中千禾夫), 고야마 유지(小山祐士), 모리모토 가오루(森本薫) 등 수많은 극작가를 소개하고 배출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군부에 전선에서 공연하는 이동형 연극단을 제안, 위원회를 만들고 문화부장에 취임해 1942년까지 이동극단을 이끈다. 그것이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라는 우익 단체다. 1950년 기시다 구니오는 문단과 연극계를 연결, 일체화해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 내려는 문학입체화 운동을 주창하며 ‘구름의 회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1954년 3월 4일,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를 연출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도쿄의대부속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음 날 아침 향년 63세로 사망한다.
옮긴이
임세륜
연극 연출가이며 히라타 오리자(平田オリザ)가 이끄는 세이넨단(青年団)의 연출부다. 2001년 건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우연히 대학로의 한 모임에 착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극을 시작한 후 〈사이공의 흰옷〉, 〈아버지와 살면〉, 〈어른의 시간〉, 〈2014년 여름〉, 〈고르곤(Gorgon)〉 등을 연출하여 언론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예술가로서 해외 진출을 목적으로 201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여러 극단, 컴퍼니 등과 교류하며 무대 연기 워크숍, 한국 희곡 읽기 모임, 신춘문예 희곡 공연 등을 진행하면서 체류하던 중 2020년 히라타 오리자를 만나 〈과학하는 마음〉(히라타 오리자 작·연출) 제작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세이넨단에 입단, 이후 야마나카(山中) 프로듀스의 〈전학생[転校生]〉(히라타 오리자 작/이시와타 아이 연출)에 출연하기도 했다. 2021년 귀국, ‘현 시대 미래적인 연극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이듬해 4월 ‘연극UNIT 世輪프로듀스’를 창단해 세이넨단 활동을 통해 느낀 한국어와 일본어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로부터 출발하는 ‘한국어 구어체 무대 언어 가능성 탐색’을 위한 연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연극 연출과 더불어 통번역, 한일 연극 교류 활동도 하고 있다.
차례
종이풍선
옥상 정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남편 : 난 당신이랑 이러고 있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 이건 진심이야. 하지만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이것도 진심이야.
아내 : 어느 쪽이 진심이라는 거야?
남편 : 둘 다 진심이야. (사이) 그러니까 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사이) 당신이 이렇게 내 옆에서 조용히 뜨개질을 한다? 당신은 과연 그걸로 만족하는 걸까? 그럴 리 없지. 내가 집에 없을 때 당신은 어딘가 방구석에서, 딸랑 혼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겠지? 난 밖에 있고, 당신의 쓸쓸한 모습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려 본다. 100엔이 안 되는 돈을 매달 어떻게 잘 써 볼까, 그런 거밖에 관심 없는 우리 생활이 정말로 싫어진 건 아닌가.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마음에 포기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은 절대 꿈이 없는 여자는 아니잖아. 난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게 알고 싶어.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이겠지. 아닌가? 아니면 그래도, 당신이 결혼 전에 가졌던 꿈을 다시 한번 그려 보고 있는 건가?
-23-24쪽, 〈종이풍선〉 중에서
나미키 : 야, 내 일이란 게 지금은 먹고사는 게 일이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미와 : 그래도 뭔가 쓰고 있는 건 있겠지?
나미키 : 벌써 그만뒀어.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 걸 알면서도 아등바등 재미없는 걸 썼다는 거, 끝난 거 아닌가? 한때는 그래도 미래 대문호의 꿈이 있었는데 말이지. 그런데도 치켜세우는 놈 따위가 있거나 그랬지…. 이상한 거야. 너 같은 애들은 모르겠지만 이런 세계는 내일이라도 행운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청개구리가 나뭇잎 위에서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한 점을 응시하는 놈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그런데 그때는 스스로 기죽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다른 사람 작품도 좋은 점은 이해하는 척하는 표정을 지으려 했지. 그래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서로 상대를 치켜세우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지쳐. 상대도 지치고. 만나도 자기들 문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게 돼. 그걸로 끝! 아무것도 아니야, 가게에 진열된 물건을, 쇼윈도에 나와 있는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 보고 왔다고 말하는 놈 말이야.
미와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뭐 하나 일다운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아.
나미키 : 그거랑은 또 이야기가 다르지. 그런데 뭐 지금은, 그런 걸 힘들어하는 것 따위는 하지 않아. 안정된 지점에선 안정되었기 때문이지. 굳이 말하자면, “밑바닥이야!”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나만큼은 그래도 반대로, 서는 거라도 높은 곳에 서 있으려고.
미와 : ….
나미키 : 그게, 이상하게 초월해 가지고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 다만, 전처럼 아득바득 살지 않겠다는 각오만큼은 되어 있다, 뭐 거기까지!
−45-47쪽, 〈옥상 정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