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진일유고≫는 성간이 죽은 뒤 1467년에 동생 성현이 편차해 간행한 것이다. 115제 245수가 수록되었는데, 성간이 30세에 요절했음을 감안하면 적은 양이 아니다. 성현이 책머리에 붙인 글을 보면 성간이 어떤 정황에서 작품을 창작했는지 알 수 있다. 성현이 <진일유고편문>에서도 썼듯이 성간의 박학강기한 자질과 뛰어난 문재는 동료들이 감탄한 정도다.
성간의 작품은 주로 20대에 지은 것으로 여러 차례 송도를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 대부분이다. 관직 재임 시에는 국가의 제정 문서를 지었다. 구체적인 사례로 27세 때는 문과에 급제해 특별히 전농직장에 제수되었다가 집현전으로 전직해 박사가 되었는데 <문종만사>, <오례서>, <훈련관사청기>, <성균관기>등을 이때 지었다. 집현전이 철폐되자 사간원 좌정언으로 전직되어 <하주반신전>을 지었다.
≪진일유고≫에는 절친한 교유들과 수창한 작품도 적지 않은데, 교유 인물은 주로 당대의 관각 문인들이다. 개인적 취향으로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중국 악부시를 의고한 악부시도 남겼는데 이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성간의 시 작품은 악부시(樂府詩)·기행시(紀行詩)·관각시(館閣詩)·교유시(交遊詩)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성간의 시 작품은 서거정·허균·홍만종·임경 등 제가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동문선≫에 성간의 작품이 시 10제, 문 4제로 총 14제나 수록되었다. ≪청구풍아≫에 시 5제, ≪국조시산≫에 시 9제, ≪기아≫에 시 8제, ≪대동시선≫에는 시 7제가 실려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시선집에 빠짐없이 수록되었음을 감안하면, 그의 작품이 높이 평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간의 시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그가 성당(盛唐)의 시를 전범으로 하고, 특히 두보의 시 경향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성간의 시 작품 가운데 내용면에서 ‘사회시’ ‘농민시’ 등으로 불리며 주목되는 작품들은 바로 두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간의 시에 나타난 현실 인식은 당시 사장파 문인들의 현실 긍정적인 시각과 차이를 보인다. 지배층 관료의 위치에서 백성의 피폐한 모습을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위치에서 그들과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참상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한시 연구자들은 성간의 이러한 시 세계를 특별히 주목해 왔다.
200자평
서른에 요절한 조선 중기의 천재 학자 진일재 성간의 유고 문집이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온갖 잡기에 두루 능통했으나 그중에서도 시문은 따를 이가 없어 중국 사신이 무릎을 꿇고 말하길 “조선의 문장이 중국보다 못하지 않다”고 할 정도였다. 사대부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시각에서 피폐한 민생을 바라보고 아파하는 그의 사회시는 마치 두보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지은이
성간은 1427년(세종 9)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다. 그의 가계를 살피면, 고조부 성여완(成汝完)은 창녕부원군, 증조부 석연(石珚)은 예문관대제학, 조부 엄(揜)은 동지중추원사다. 부친 염조(念祖)는 지중추원사를 지냈다. 형 성임(成任)은 의정부 좌참찬, 동생 성현(成俔)은 대제학을 지냈다. 실로 당대의 명문거족이라 할 수 있다.
어릴 때는 자유분방해 법도에 얽매이지 않았다. 항상 막대기를 가지고 날마다 거리에서 놀았는데 사람들이 진실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13세에 이런 행실을 바꾸어 학문에 정진해 1441년(세종 23) 15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18세 때(1444), 21세 때(1447) 두 차례나 과거에 낙방했다. 이후로 발분해 오로지 학문에 힘써 10여 년이나 밤을 낮으로 삼아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1453년(단종 1) 봄에 27세로 문과에 제3인으로 급제해 특별히 전농직장(典農直長)에 임명되었다. 이해 10월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그는 집현전 박사로 전직해 국가 교서(敎書) 대다수를 저술했다. 다음해에 수찬(修撰)으로 승진했다. 당시 그는 동료들로부터 ‘서음전벽(書淫傳僻)’이라는 놀림을 받았을 정도로 장서각에 파묻혀 독서에 몰두했다.
성간은 사서와 제자백가는 물론 잡예에도 능통했다.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서화·산술·역어(譯語)·음운(音韻) 등에 모두 정미(精微)하고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다. 심지어 “내가 문장과 기예에는 모두 능숙하나, 오직 음악에는 능숙하지 못하다” 말하고, 김 악사(金樂師)에게 거문고를 배웠는데 몇 달 안 되어서 요묘(要妙)한 데까지 이르렀으며, 율려(律呂)에 통찰했다고 한다.
성간은 평생 동안 매사에 몰두하고 조금도 늑장을 부리지 않았다. 몸을 돌보지 않았던 때문에 기운이 약하고 매우 수척했다. 몸집이 여위어 후리후리하고 뼈대가 수척해 겉모습이 몹시 추한 정도였다. 세조가 일찍이 선비를 뽑을 적에 성간을 보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네 비록 재주는 있으나 모양이 너무 추하니 관직은 괜찮지만 승지 같은 가까운 자리는 불가하다” 했다. 이로 인해 성간을 ‘어람좌객(御覽座客)’이라 했다.
1456년(세조 2)에 여러 학사들이 줄지어 죽임을 당했을 때 집현전에서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으로 전직되었으나 취임하지 못하고 그해 7월에 병으로 죽었다. 나이 30세였다. 일찍이 자신의 운명을 점쳐서 “내 나이 삼십만 넘으면 족하다”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상을 마치니 사람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세조는 그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방에 문성(文星)이 없어졌다”고 했으며, 모두 애통해했다.
성간은 30세라는 짧은 생애 속에서도 10여 년간 송도를 유람하거나 사찰에서 독서했다. 그리고 세종·문종·단종·세조 네 임금을 모셨다. 27세에 관직에 들어서서 겨우 3년간 관료로 있었다. 뛰어난 재질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추한 외모 때문에 임금 가까이서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어람좌객’이란 기롱을 감내하며 집현전 장서각에서 독서에만 몰입한 나머지 병약해 요절한 것이다. 그의 가족으로 부인 이씨는 감찰(監察) 이함녕(李咸寧)의 딸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세적(世勣)으로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다. 둘째는 세덕(世德)이다. 딸은 후릉참봉(厚陵參奉) 김이(金㶊)에게 출가했다. 불행하게도 두 아들은 꼽추이거나 광질(狂疾)이 있어서 부친의 뜻을 계승하지 못했다.
옮긴이
처인재 주인 홍순석은 경기도 용인 토박이다. 어려서는 이귀선(李貴善) 선생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그것이 단국대, 성균관대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지역문화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강남대 교수로 재임하면서부터다. 용인·포천·이천·안성 등 경기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에 35년을 보냈다. 본래 한국문학 전공자인데 향토사가, 전통문화 연구가로 더 알려져 있다. 연구 성과물이 지역과 연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인문대학장, 출판부장, 인문과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그동안 ≪성현문학연구≫, ≪양사언문학연구≫, ≪박은시문학연구≫, ≪김세필의 생애와 시≫, ≪한국고전문학의 이해≫, ≪우리전통문화의 만남≫, ≪이천의 옛노래≫ 등 60여 권의 책을 냈다. 지만지 고전선집 시리즈 가운데 ≪읍취헌 문집≫, ≪봉래 문집≫, ≪용재총화≫, ≪허백당집≫, ≪부휴자 담론≫ 을 출간했다. 짬이 나면 글 쓰는 일도 즐긴다. ≪탄 자와 걷는 자≫는 잡글을 모은 것이다.
차례
서(序)
진일유고 서문
진일유고 편문
진일유고 권1
잡시 3수
도 징군을 본받음
안 특진을 본받음
포 참군을 본받음
태묘의 제사 후 연향에서 2수
세자의 책봉을 하례하는 시
가사 구절
영주에 올라
대루원
봉황지
대궐
중궁의 입춘 첩자
습진행
팔준도
중국에 가는 이자야를 보내며 2수
본국으로 돌아가는 예 천사를 보내며
중국 사신 사마씨를 보내며
옥당 학사와 성남에서 놀며
경순 형제와 기녀를 데리고 장의사동에 놀며
회포를 적다 2수
옥당에서
본전의 여러 공에게
청보에게 화답하다
옥당에서 우연히 읊다
궁사 사시
기녀를 바라보며
남에게 붓과 먹을 빌리고
일본국 승려를 보내며
제야 3수
용문의 백 년 된 오동나무
벗에게 부치다 2수
회포를 적다 2수
가을 산을 그리다
풍우도
관아에서 이자야에게
봄비에 백씨에게 부치다 연아
경주회고 8수
진일유고 권2
강가에서 숙박하며 2수
도중
배에서
산수도에 적다
어부 6수
담담정 4수
담담정 사시
마포에서 밤비를 탄식함
청강곡
목우도
노안도
밤중에 피리 소리 듣다
미인행
채련곡
나홍곡 12수
회문으로 지어 낭군에게 부침 2수
염양사 2수
노인행
전장행
황작가
악풍행
아부행
원시 2수
수양산 3수
등고시 5수
병인년 9월 9일에 높은 곳에 올라 10수
태산시 10수
근친하러 돌아가는 이 공을 보내며
문종 만사 2수
강중시에 차운하다 4수
또 차운함 4수
절구 3수
영통사 서루운에 차운하다
눈
진일유고 권3
잡시
옛 시를 본받아 4수
강경우에게
청천헌 게송
서강중에게 2수
임자심에게
성원위에게 드림 2수
노 정랑에게
병중에 중경에게
회포를 적다 3수
연꽃
게
비가 개어 2수
절구 5수
동산에서 3수
소나무 그림
내공의 잣나무 2수
내공의 대나무
꿈에 물가에 갔다가
매미 2수
칠석
밤에 앉아서
용 2수
희롱 삼아 채자휴의 시에 차운하다 8수
임금님의 수레
가형과 함께 하응천을 불러 놓고
응천이 당도하고 다시 한 수를 짓다
구일 운에 차운하다
산사 2수
전 스님께 화답하다 8수
무제 3수
송도에 노닐며 2수
송도에서 백씨에게 차운하다
밤에 백씨를 생각하며
밤에 두견새 소리를 들으며
우연히 흥이 일어
여러 분께 차운하다
무제
회포가 있어
과거에 낙방한 최세원에게 주다
이 상국의 고택에서
절구
벗이 온 것이 기뻐서
순채
어부
성거산 상봉에 올라
누각에 올라
진일유고 권4
신설부
민우부
오례서
구일등고시서
송이수재서
송범사유방서
유관악사북암기
훈련관사청기
성균관기
병중잡설
서강중시고후
용부전
하주반신전
발문
진일유고 발문
부록
진일선생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악풍행
모진 바람 서쪽에서 땅을 말아 부는데
눈송이 아득하게 방석같이 크구나
처음엔 성글더니 버들개지처럼 날리며
잠깐 사이 뜨락에 한 자나 쌓였네
농부는 일찍 일어나 기쁘게 말하길
내년엔 풍년 들 징조임을 알겠노라
나락을 수레에 가득 실을 때 있으리니
빈 창고에 먼지 쌓일 근심이 없겠네
짧은 옷을 정강이 가리려 당길 필요 없고
아이는 섶을 져다 구들에 불을 때리라
나는 이 말 듣고 엎어질 듯 기뻐하며
웃으면서 하늘 향해 길게 박수를 쳤네
만백성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된다면
내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도 좋으리
아! 내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도 좋으리
惡風行
惡風西來捲地吹。雪花茫茫大如席。
疎疎初作柳絮飛。俄頃庭除深一尺。
田翁早起喜相語。來成豐兆占可識。
稻車穩載庶有時。不憂空廩塵自積。
短衣掩脛不須挽。健兒負薪燒我突。
我聞此語喜欲顚。笑向天工手長拍。
若使萬姓免飢寒。吾受飢寒死亦足。
嗚呼。吾受飢寒死亦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