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프랜시스 보몬트와 존 플레처는 공동 극작으로 당대 가장 찬사를 받은 작가들이다. 엘리자베스 및 자코비언 시대에는 극작가 간 협업이 흔했으며, 셰익스피어도 플레처와 공동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처녀의 비극(The Maid’s Tragedy)>은 보몬트가 주요 테마를 설정하고 최종 편집을 맡았으며, 플레처가 2막 2장, 4막 1장, 5막 12장을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극적 흐름을 벗어나 궁정 드라마의 새로운 유형을 정립했으며 17세기 궁정극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극은 전쟁 영웅 멜란티우스가 친구 아민토의 강제 결혼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전개된다. 아민토는 왕의 강요로 약혼녀 아스파시아 대신 에바드네와 결혼하지만, 첫날밤 그녀의 거부로 혼란에 빠진다. 이후 에바드네가 왕의 정부임을 알게 된 아민토는 그의 권력 앞에서 복종을 선택한다. 그러나 멜란티우스는 가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누이동생 에바드네에게 왕을 직접 살해하도록 강요한다.
멜란티우스는 전형적인 군인으로, 누이와 왕의 부정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해 왕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그는 에바드네를 이용해 왕을 살해하게 만든다. 직접 반역을 시도하지 않고도 왕을 제거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반면 아민토는 소극적이며 윤리적 갈등에 시달리는 인물로, 왕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기보다 신하로서 의무와 사회적 체면을 우선한다. 그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도 왕의 권위에 복종해 이를 묵인한다.
한편 여성 인물 아스파시아와 에바드네는 당대 여성의 억압된 위치를 반영한다. 아스파시아는 약혼자의 배신에 남장을 하고 결투를 신청하는 방식으로 복수하며, 결국 아민토를 따라 죽음에 이른다. 에바드네는 왕의 정부로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강요받았지만 자신을 억압한 왕을 직접 살해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려 한다. 그러나 두 여성 모두 당대 사회 질서에서 벗어난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그려지며, 결말에서 사라진다.
이 극은 절대 군주제와 권력의 남용을 비판하며,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왕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도 반성하지 않으며, 결국 에바드네의 손에 살해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국가에 해악을 미치지 않고 후계자가 곧바로 왕위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극작가는 절대 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체제 전복의 위험은 피해 간다. 이는 정치적 검열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처녀의 비극>은 단순 궁정 복수극을 넘어 당대 권력 구조, 남성 중심의 도덕관념, 여성의 위치 등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200자평
왕의 부당한 명령으로 강제 결혼한 아민토, 왕과 누이의 부정을 알게 된 멜란티우스가 복수에 나선다. <처녀의 비극>은 궁정 복수극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전통적인 비극적 요소 대신 절대 군주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특히 여성 캐릭터들의 역할을 강조하며,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 속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지은이
프랜시스 보몬트(Francis Beaumont, 1585-1616)
1585년 영국 레스터셔에서 태어났다. 1597년 옥스퍼드 브로드게이트 홀(현 펨브룩 칼리지) 입학 후 학업을 중단했다가 1600년 이너 템플 법학원 입학하지만 문학에 몰두한다. 1602년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로 데뷔한다. 1607년에는 벤 존슨의 〈볼포네〉에 플레처와 함께 헌사를 썼다. 7년간 플레처와 공동 창작으로 작품을 여러 편 썼다. 1647년 출판된 35편 중 10편이 공동 창작 작품이다. 한편 대표작 <불타는 절굿공이의 기사>는 보몬트 단독 작품으로 간주된다. 1613년 결혼 후 극작 활동 중단한다. 1616년 런던에서 사망,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 1579-1625)
1579년 영국 서섹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교였다. 11세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케임브리지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1606년부터 극작을 시작했다. <정숙한 양치기 처녀>의 실패 후 <필래스터>의 성공으로 상업적 극작가로 자리 잡는다. 보몬트 외에도 필립 매신저, 네이선 필드, 윌리엄 로울리와 협업했으며 셰익스피어와 <두 귀족 신사>, <헨리 8세>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플레처의 작품은 감정적이고 웅변적인 대사, 센세이셔널한 플롯, 개연성을 희생한 극적 효과가 특징이다. 1625년 런던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옮긴이
심지영
충북대학교에서 셰익스피어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1부(Henry the Fourth, part 1)》, 《헨리 4세 2부(Henry the Fourth, part 2)》, 《십이야(Twelfth Night)》를 번역했고, 〈헨리 4세 1, 2부에 나타난 권력과 저항의 문제》, 〈셰익스피어 로맨스극의 여성 원리〉, 〈노마디즘으로 바라본 셰익스피어 로맨스극 주인공들〉, 〈겨울 이야기 : 감시와 처벌 그리고 저항〉, 〈사회적 타자에 대한 혐오자들의 수치심 : 말볼리오(곰) 놀리기를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썼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4막
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에바드네 : 밤은 한없이 깊어 가고 주변의 모든 것은
나의 어두운 목적을 닮았구나. 오, 타락한 처녀의 양심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끌어당길 것이냐?
어떤 깊은 지옥처럼 음침하고 무시무시한 것들로
나를 도발할 것이냐?
심장에 피가 통하고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이 시간부터 부디 어떤 여자도 감히 외도하지 않기를.
이것은 평화로운 삶을 버리고 바다로 나가 싸웠던
저 구제 불능의 바보를 넘어서는 대담함이다.
이것은 너무나 많아서 한 시대가 회개할 수 없고,
너무나 커서 신들이 자비를 베풀지 않는 죄다. 하지만 끝까지 해내고 말겠어.
나는 내 명예를 줄곧 학살해 왔으니
반드시 저곳에서 그 학살을 끝마쳐야 한다.
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