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르히오 블랑코는 현재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다. 2023년 〈테베랜드〉 한국 초연을 위해 내한해 관객과 만났다. 드라마는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인물 ‘S’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S’는 존속 살해를 주제로 한 연극에 진짜 존속 살해범을 출연시키겠다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관객과 독자를 본격적인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
우리 모두는 오이디푸스처럼 모호한 테베를 가지고 있어요. 조금 혼란스럽고 어두운 곳. 이해할 수 없는 영역 같은 거요.
연극의 주제는 첫 장면에서 작가에 의해 제시된다. ‘존속 살해’다. 곧바로 존속 살해의 상징 오이디푸스가 소환된다. 마르틴은 현대판 오이디푸스 같은 인물이다.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마르틴이 잔혹하게 아버지를 살해하게 된 배경이 드러난다. 이 드라마는 “마르틴이 왜 아버지를 죽였을까?” 살해 동기를 파헤치도록 설계된 미스터리 추리물이 아니다. 질문은 다른 데서 터진다. “오이디푸스를 존속 살해범으로 볼 수 있을까?”
오이디푸스는 웬 노인을 몽둥인지 뭔지로 쳐 죽일 때 상대가 아버지인 줄 몰랐다. 마찬가지로 스핑크스에게서 테베를 구하고 그 공로로 테베 왕비와 결혼할 때 상대가 어머니인 줄 몰랐다. 이를 진짜 존속 살해, 근친상간이라 할 수 있을까?
라이오스는 아들에게 왕국을 빼앗기리라는 예언에 겁먹고 갓 태어난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 그를 진짜 아버지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로부터 제목이 정해졌다. “테베랜드”!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어둡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 ‘S’는 우리 모두가 그런 ‘테베’를 가졌다고 말한다. ‘테베’는 한때의 아들들이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발목을 묶고 뛰어내려야만 하는 바누아트의 절벽인 걸까?
모두들 조금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요
마르틴이 ‘S’에게 묻는다. “당신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적 있나요?” 바로 그날 아침에도 아버지와 통화하며 애정을 나눈 ‘S’도 나중엔 말끝을 흐리며 어쩌면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고 고백한다. 오이디푸스와 명백히 다른 점은 마르틴도, S도, 우리도 죽이고 싶었던 상대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존속 살해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되었지만 실제 ‘존속 살해’라는 죄에서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러나 상징을 읽고 쓰는 우리는 최소 존속 살해 기도(?)범이다. 이제 오이디푸스와 마르틴에게서 빠져나온 질문이 독자, 관객에게 돌진한다. 우리는 각자의 테베랜드에서 어떤 죄와 벌을 감당했을까, 혹은 감당하게 될까?
사실 그 거리가 바로 예술을 항상 현실보다 더 우월하게 만들죠
이 모든 이야기가 바로 실제처럼 재현된다. ‘S’는 세르히오 블랑코 자신 같고, 마르틴은 그가 인터뷰한 재소자 같다. 그렇게 ‘테베랜드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결과물인 이 텍스트, 이 연극을 보게 된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실제인지 허구인지 모를 이 모호함은 작가이자 연출가로 설정된 1인칭 서술자가 이야기를 전하면서 비롯된다. ‘오토픽션’ 전략이다. 극과 현실의 경계도 이처럼 모호한데 페데리코라는 배우의 존재는 극과 극중극의 경계까지 흩트린다.
마르틴은 연극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을 재현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누구도 마르틴을 대신할 수 없다. 마르틴의 이야기를 온전히 전할 수도 없다. 연극은 그 거리감으로부터 인물과 사건을 창조해 내는 예술이다. 단순 모방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존속 살해라는 고전 주제 아래서 정치 철학 예술을 깊이 파고드는 질문들이 종횡으로 만난다. 정교하게 코드화된 작품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해독하는 “지적 유희”를 즐겨 보길 바란다.
200자평
드라마는 S가 부친 살해 혐의로 중인 마르틴이라는 젊은 재소자를 면회한 뒤 그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나가면서 전개된다. 2012년 초연 이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나라에서 공연되었다. 우루과이 국가 희곡상 외 다수의 국제 희곡상을 수상했다. 2023년 한국 초연했다.
지은이
세르히오 블랑코(Sergio Blanco, 1971∼)
현재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 중 한 명. 1971년 우루과이에서 태어나 몬테비데오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현재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 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한 뒤 프랑스 코메디아 프랑세즈에서 연출을 공부하고 전적으로 희곡 집필과 연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도살(Slaughter)〉, 〈야만(Barbarie)〉, 〈카산드라(Kassandra)〉, 〈다윈의 도약(El salto de Darwin)〉, 〈오스티아(Ostia)〉, 〈뒤셀도르프의 포효 소리(El bramido de Düsseldorf)〉, 〈당신이 내 무덤 위를 지나갈 때(Cuando pases sobre mi tumba)〉, 〈교통(Tráfico)〉, 〈실종에 대한 지도 제작(Cartografía de una desaparición)〉, 〈코비드 451(COVID 451)〉 등이 있다. 그의 연극은 전 세계 25개국 이상에서 출판되고 공연되었으며, 2022년 밀라노의 피콜로 극장에서 신작 〈동물원(Zoo)〉을 발표했다. 극작과 연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세미나와 강의를 하는 등 학술 활동도 활발히 병행하고 있다. 2013년 우루과이 국립극단의 초청을 받아 1년 동안 국립극단 연구소장으로 일하고, 2014년 우루과이 국립 무대예술 학교에서 1년 동안 수행할 오토 픽션을 주제로 한 연극 연구를 진행했다.
옮긴이
김선욱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와 동대학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국립대학교(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에서 스페인 연극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스페인과 중남미 연극에 대한 연구와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의 연극을 번역하고 무대에 올리는 한편 드라마투르그(문학 감독)와 연극 평론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공연 예술》(공저), 《작품으로 읽는 스페인 문학사》(공저) 등과 역서로 《누만시아》, 《살라메아 시장》, 《푸엔테오베후나》, 《죽음 혹은 아님》 등 다수가 있다. 논문으로는 〈연극사 각 시대별 연기 양식 비교 연구 : 음악적 대사의 연극적 재현의 역사〉, 〈르네상스와 바로크 과도기 시기 스페인 연극의 관객 : 또레스 나아로를 중심으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연극과 연극 축제〉 등과 평론으로 〈젊은 작가와 극단의 재기발랄한 놀이 : 극단 이상한 앨리스의 변기 속 세상〉, 〈사회적 폭력에서 잉태된 개인의 폭력, 그리고 그 치유에 대한 희망 : ‘주인이 오셨다’의 텍스트 구조와 의미〉, 〈‘마호로바’의 미덕 : 그 구조와 연기 앙상블〉 등 다수가 있다. 이외에도 〈번역극의 드라마투르그 임무와 역할〉과 같은 연극과 관련한 많은 문화 칼럼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부
2부
3부
4부
에필로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S : 저는 〈테베랜드〉라고 불리는 지금 이 프로젝트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산마르틴 집행부에 프로젝트 첫 번째 초안을 제출하자마자 좋은 평가를 받고, 그때부터 존속 살해 주제를 다룬 이 작업의 공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대에서 진짜 죄수, 진짜 존속 살해범과 작업하면 좋겠다고 말했고, 산마르틴 극장과 첫 번째로 결정한 것은 무대에서 진짜 죄수와 함께 작업할 수 있게 정부와 모든 법적인 절차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진실함의 문제는 이 프로젝트의 세부적인 사항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제 관심은 연극이 아니라 거의 실제 형식으로서 존속 살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분도 이미 상상하셨듯이 바로 이런 이유로 무대 장치를 케이지나 격자창 같은 종류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정부가 우리에게 제시한 조건 중 하나였습니다. 정부는 우리에게 정해진 안전 조치를 지켜야 한다는 조건으로 공연을 허락해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무대에 케이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내무부가 동의한 서류는 ‘최소 3미터 높이를 가진 울타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요구 사항을 한 치 어긋남도 없이 수용했습니다. 처음에 케이지에 대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존속 살해범 마르틴, 이것이 그의 이름입니다, 마르틴 산토스를 처음으로 만나기 위해 감옥에 갔던 날까지 저는 케이지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산마르틴 극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첫 번째 약속은 농구장에서였습니다. 그 농구장은 모든 감옥이 그러하듯이 이 같은 케이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저는 우리가 안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시 저는 무대는 케이지로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대 장치 관점에서 정부 당국이 안심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연극적인 관점에서 마르틴과의 만남 공간을 창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모든 요구 사항을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 논외인데, 여러분에게 고백하자면, 연극 카탈로그와 이 프로젝트의 예술적인 지시 사항이 부분적으로 내무부 공식 성명에 의해 언급되는 것도 저는 예술적으로 흥미로웠습니다. 교도소장에게 처음부터 마르틴과의 모든 만남을 농구장에서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게 생각나는군요. 대답은 긍정적이었습니다. 좋습니다. … 어쩌면 이제 우리는 우리 첫 번째 만남을 공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본 순간이요. 괜찮죠? 좋습니다.
1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