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생의 고통과 즐거움, 연약하고 헐벗은 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빚어낸 하나의 세계.
시인과 당나귀 플라테로는 끊임없이 모게르를 배회하며,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차곡차곡 기억에 담는다. 생의 고통과 즐거움, 더러움과 아름다움을 치우치지 않게 지니고 있는 이 시적 공간은 현실의 모게르를 닮아 있지만, 실은 하나의 완전하고 독립된 세계다. 히메네스 시인은‘나’가 지배하는, 그를 둘러싼 사회로부터 격리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너무나 작게 축소된 이 특별한 우주를 통해 그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자신의 감정을 서정적 인상으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주관적 내면화와 더불어 비판적 시선을 통해 밖에서 들여다본 사회상이 드러나게 된다. 시인의 세계에는 나약한 생명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파괴되는 자연, 인간들의 잔인성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반드시 극복되거나 배척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소망과 당위와는 달리 그것들은 늘 그랬듯이 자신의 몫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의 어두움마저 계절의 순환처럼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존재 조건으로 승화돼 버리고 만다. 시인은 프롤로그에서 “즐거움과 고통이 플라테로의 두 귀처럼 쌍둥이가 되어버린 이 짧은 책”이라는 말로 그러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시인은 플라테로와 함께 더욱 부지런히 모게르를 배회하며, 힘없고 헐벗은 이들을 연민하고 노래할 따름이다. 그들의 고통이 있는 곳에, 거기에 상반되는 아름다운 묘사가 있는 것은 그들을 더욱 잘 드러내기 위함이다.
자연의 서정과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감각적인 묘사들과 시어들이다.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현실의 묘사에서 모든 감각을 최대한으로 일깨우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중 가장 빈번한 것은 단연 시각적 이미지다. 다양한 색채의 사용은 단순히 색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는 것이다. 흰색과 푸른색, 노란색 등 순수와 생명력을 지닌 색채들이 모게르의 하늘과 들과 바다를 장식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풍경화 연작들이 만들어진다. 독자들은 시를 감상하며, 시인과 플라테로의 여행에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의 주인공들은 순수하고 연약한 생명들, 더불어 농투성이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감싸 안고 있는 모게르의 넓은 자연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풍속주의와 문화 중심주의 간의 대조, 일상적인 대화체와 마을 사람들이 쓰는 저속한 표현의 병치, 상징적이고 단순한 표현과 대비되는 예술적인 이미지들의 짜임새가 이 시집의 복잡하면서도 미학적인 단일성을 형성한다. 또한 풍부한 리듬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200자평
스페인 서정시의 대가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산문시집이다. 시인은 플라테로라는 은빛 당나귀와 함께 자신의 서정을 담아낸 세계를 빚어낸다. 그곳은 모든 아름다운 추억들이 빛바래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는 세계다. 삶의 고통과 어두움마저 잊지 않고, 위로하고 껴안는 세계다. 시인과 플라테로는 더 많은 존재들과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끊임없이 배회한다. 그들의 여행에 동참하는 동안, 독자들은 잊어버린 순수를 다시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후안 라몬 히메네스(Juan Ramó́n Jimé́́nez, 1881~1958)는 1881년 스페인 남부의 항구 도시 모게르(Moguer)에서 출생했다. 산타 마리아의 예수회 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문학에 관심을 보여, 14세에 이미 낭만주의 시인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와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의 시를 읽었다. 어린 시절부터 특히 그림에 애착을 보였으며 그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는 빛과 색채 그리고 그림에 대한 열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에도 재능을 발휘하여 <새 생활(Vida Nueva)> 같은 잡지에 기고하자 모더니즘의 선두주자들인 루벤 다리오와 비야에스페사의 극찬을 들었다. 그러나 마드리드에서 처음 발표한 시들이 비평가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자, 이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가족들은 시인으로서 실패한데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겪게 된 그를, 재충전을 위한 휴식의 일환으로 남 프랑스로 보낸다. 그는 그곳에서 상징주의 시인들(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1903년, 스페인 현대시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는 시집 ≪슬픈 아리아≫를 발표한다. 1908년 무렵부터 그의 시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러한 변화는 ≪애가≫, ≪잔잔한 고독≫등의 시집에 명확히 드러난다. 이 작품들에서는 그간의 민중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8음절 이상의 시구, 특히 잘 다듬어진 14음절의 알렉산드로 격의 시구를 사용, 단순한 묘사 대신 복잡한 공감각적 표현과, 이미지의 비이성적인 면에 바탕을 둔 서술 요소들이 등장한다. 1912년 말 그는 마침내 마드리드로 돌아와 마드리드의 대학생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그곳에서 세노비아 캄프루비 아이마르를 만난다. 1914년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줄 ≪플라테로와 나≫를 발표한다. 1916년 뉴욕에서 세노비아와 결혼, ≪신혼 시인의 일기≫를 출간하면서 그의 작품에 근원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난해하면서도 대중적인 시인 고유의 목소리로 담아낸 ≪영원함≫, ≪돌과 하늘≫,≪시≫ 등이 당시의 대표작이라 하겠다. 1936년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 잠시 워싱턴에 머물다가 1951년 푸에르토리코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며 그곳에 영구 정착한다. 이때 ≪다른 측면에서≫와 1948년에서 1949년까지의 시를 모은 ≪욕망하고 욕망되어지는 신≫을 발표한다. 1956년, 그의 부인 세노비아가 죽기 3일 전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58년 5월 29일 사망한다.
옮긴이
성초림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했다. 동대학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한−스페인어 통·번역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스페인 현대문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선문대 통번역대학원과 한국외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문학 번역에서의 ‘보상’의 문제>(<서어서문연구>, 2003.09), <사회·정치권력과 문학장의 형성>(<스페인어문학>, 2004. 06), <한국문학의 스페인어 번역−공동 작업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요소 번역의 문제점>(<통역과 번역> 제11권 1호, 2009) 외 다수가 있다. 저서로는 ≪스페인어문법 기초다지기≫(한국외대출판부, 2007), 역서로는 이순원의 ≪해파리에 관한 명상≫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Reflexiones sobre una medusa≫(Trotta, 2005), ≪파주 책마을 이야기≫를 스페인어로 옮긴 ≪Historia de la Ciudad del Libro de Paju≫(2008) 등이 있다.
차례
어린아이들을 위한 이 책을 읽는 어른들에게 보내는 경고
1. 플라테로
2. 하얀 나비
3. 해 질 녘 놀이
4. 일식
5. 으스스한 한기
6. 유치원
7. 미치광이
8. 유다
9. 무화과 첫 열매
10. 삼종기도 소리!
11. 너 죽은 후에
12. 가시
13. 제비들
14. 마구간
15. 거세된 어린 말
16. 앞집
17. 바보 아이
18. 유령
19. 진홍색 풍경
20. 앵무새
21. 옥상
22. 돌아오는 길
23. 닫힌 쇠창살문
24. 돈 호세 신부님
25. 봄
26. 저수조
27. 옴 붙은 개
28. 물웅덩이
29. 4월의 목가시
30. 카나리아 날다
31. 악마
32. 자유
33. 헝가리 유랑 집시들
34. 연인
35. 거머리
36. 세 늙은 여인네들
37. 작은 수레
38. 빵
39. 아글라이아
40. 라코로나 소나무
41. 다르봉 씨
42. 소년과 물
43. 우정
44. 자장가 부르는 아이
45. 안마당의 나무 한 그루
46. 폐결핵을 앓던 소녀
47. 로시오의 축제
48. 롱사르
49. 요지경 아저씨
50. 길가의 꽃
51. 로드
52. 우물
53. 복숭아
54. 뒷발길질
55. 당나귀학(學)
56. 성체축일
57. 산책
58. 투계장
59. 밤이 내리다
60. 도장
61. 새끼 낳은 개
62. 그 여자와 우리들
63. 참새들
64. 프라스코 벨레스
65. 여름
66. 산불
67. 시냇물
68. 일요일
69. 귀뚜라미의 노래
70. 투우
71. 폭풍우
72. 포도 수확
73. 야상곡
74. 사리토
75. 마지막 시에스타
76. 불꽃놀이
77. 베르헬 공원
78. 달님
79. 즐거움
80. 오리들이 지나간다
81. 계집아이
82. 목동
83. 카나리아 죽다
84. 언덕
85. 가을
86. 꽁꽁 묶인 개
87. 그리스 거북이
88. 10월의 저녁
89. 안토니아
90. 잊힌 포도송이
91. 제독이
92. 삽화
93. 비늘
94. 피니토
95. 틴토 강(江)
96. 석류
97. 오래된 묘지
98. 리피아니
99. 카스티요
100. 옛 투우장
101. 메아리
102. 깜짝 놀라서
103. 오래된 샘물
104. 길
105. 솔방울
106. 도망친 황소
107. 11월의 목가시
108. 흰색 암말
109. 센세라다
110. 집시
111. 불꽃
112. 회복기
113. 늙은 나귀
114. 동트는 아침
115. 작은 꽃들
116. 성탄절
117. 리베라 거리
118. 겨울
119. 암나귀 젖
120. 순수한 밤
121. 미나리 왕관
122. 동방박사
123. 몬스 우리움
124. 포도주
125. 우화
126. 사육제
127. 레온
128. 풍차
129. 탑
130. 모래 장수의 나귀들
131. 사랑의 소야곡
132. 죽음
133. 그리움
134. 발판
135. 그리움
136. 모게르 하늘에 묻힌 플라테로에게
137. 마분지로 만든 플라테로
138. 땅에 묻힌 플라테로에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Lo llamo dulcemente: ≪¿Platero?≫, y viene a mi con un trotecillo alegre que parece que rie, en no se que cascabeleo ideal…
내가 “플라테로?” 하고 다정하게 부르면, 어느 꿈속에서 들어본 방울소리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웃음소리처럼 또각또각 즐거운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