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에스파냐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르카의 3대 비극의 첫번째 작품인 ≪피의 혼례≫는 결혼식날 신부가 옛 연인과 도망침으로 인해 결국 결혼식이 피로 물드는 비극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다.
옛 그리스인들은 ‘오이디푸스’나 ‘주신제(酒神祭)’를 보러 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이 일어날 숙명적인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현대에 들면서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피의 혼례>에서 로르카는 ‘말’, ‘자장가’, ‘칼’, ‘달’ 등의 상징적 요소를 사용하여‘숙명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을 만들었고, 그래서 그 일의 결과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일을 풀어 나갈지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극의 전개를 두고 ‘어떻게’를 묻지 않고 ‘왜?’를 물을 때 극은 비극이 아니라 드라마나 멜로드라마가 된다.
주인공들은 이해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맹목적인 힘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에겐 설명할 잘못도 설명할 가치가 있는 변명도,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도 없다. 원하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우주의 힘, 자연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인간의 본성적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분노의 신, 아니 그저 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힘에 무릎을 꿇고 만 감상적인 인간 존재일 뿐이다. 그들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이중창으로 자기들의 운명을, 자기들이 비극적인 연인임을 인정한다. 서로에게 이끌렸던 힘에 저항할 수 없었던 사실을, 그러한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그들이 운명적으로 죽어야만 한다
<피의 혼례>의 무대가 된 안달루시아는 옛 그리스의 문화 정서를 갖고 있고 로르카는 그 정서를 송두리째 뽑아내어 우리를 매혹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우리 시대의 에우리피데스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00자평
투우와 플라멩코, 정열의 나라 에스파냐가 낳은 대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르카의 비극 3부작, 그 첫 번째 작품. 결혼식 날 옛 연인과 도망친 신부로 인해 피로 물드는 결혼식을 격정적이고도 시적으로 그리고 있다. 인간의 의지로는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힘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는 비극의 정수를 보여 준다.
지은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의 그라나다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1898년 6월 5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달루시아의 자연은 그의 감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학시절 ‘엘 린콘시요’라는 모임에 참여하는데 이 모임을 이룬 상당수가 스페인 현대 문화계를 이끈 대표적 인물들이다. ‘엘 린콘시요’에 속했던 사람들은 로르카의 문학적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했다. 로르카는 이 모임 동료들의 격려에 힘입어 1918년 첫 시집 ≪인상과 풍경≫을 발간한다. 1918년 마드리드로 간 그는 당시 스페인 지성인의 요람이었던 ‘학생 기숙사’에 머물며 초현실주의 영화감독 부뉴엘과 화가 달리 등과 교분을 쌓았으며 스페인의 보수적 교육 전통에서 벗어나 그 시대의 자유정신에 입각해 지성인과 과학자를 키워 내고 있던 ‘자유교육협회’에도 등록해 인간 자유정신을 옹호하는 문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인간 존재에 대한 자유, 인간 본능에 대한 외침으로 이루어진 그의 삶의 흔적들은 그의 문학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신비하고 아름답고도 격정적인 시를 썼을 뿐 아니라 스페인 연극사에 있어 극을 창시하고 인형극을 부활시켰으며, 비극이 불가능한 현대에 옛 그리스 비극의 정수를 부활시켰다. 또한 창작 활동에만 안주하지 않고 대학생들로 구성된 ‘움집’이라는 순회공연 극단을 창단해서 대중들에게 스페인 고전극을 널리 알렸다.
옮긴이
안영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국립대학교에서 오르테가의 진리 사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페인 외무부 및 오르테가 이 가세트 재단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스페인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 ≪엘시드의 노래≫, ≪좋은 사랑의 이야기≫, ≪라셀레스티나≫,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 돈 후안≫, ≪인생은 꿈입니다≫, ≪죽음 저 너머의 사랑≫, ≪죽음의 황소≫, ≪예술의 비인간화≫, ≪세 개의 해트 모자≫, ≪러시아 인형≫, ≪피의 혼례≫, ≪예르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 만차≫,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 만차≫ 외 다수가 있고, 저서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의 비극적 삶과 죽음, 그리고 작품≫, ≪스페인 문화의 이해≫, ≪올라 에스파냐: 스페인의 자연과 사람들≫, ≪왜 스페인은 끌리는가?≫, ≪서문법의 이해≫, ≪작품으로 읽는 스페인 문학사≫(공저) 외 다수가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말이 울기 시작해.
다리는 다쳤고
갈기는 얼어붙었으며,
두 눈 속에는
은으로 된 칼이 있어.
강으로 내려갔어.
저런, 어떻게 내려갔다지?
피는 물보다
더 세게 흘러갔어.
2.
입도 뻥긋 못하고 자기 자신을 불태운다는 건 우리가 우리에게 씌울 수 있는 가장 큰 벌이지. 자존심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었고, 너를 보지 않고 밤마다 깨어 있는 너를 그냥 내버려 둔 게 내게 무슨 소용이 있었지? 아무 소용도 없었어! 내 위로 불을 끼얹는 일이었어! 넌 시간이 약이고 별들이 덮어 준다고 믿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사실이 아니라고. 일이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떤 심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걸 어쩌지 못해!
3.
내 혀에 어떤 유리 파편이 박힌단 말인가!
난 잊고 싶었어, 그래서
네 집과 우리 집 사이에 돌담을 쌓았어.
사실이야. 너 기억 안 나?
그리고 내가 널 멀리서 봤을 때
내 눈에 모래를 뿌렸어.
하지만 말을 타면
말은 네 집으로 갔어.
은으로 된 바늘로
내 피는 검게 되었고,
꿈은 내 육신을
독초로 가득 채웠어.
내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땅과
너의 가슴과 머리카락에서 나는
그 냄새 때문이야.
4.
제가 다른 남자랑 갔기 때문이죠, 제가 갔기에! (고뇌에 차서) 당신도 갔을 겁니다. 난 안팎으로 상처 받고 타 버린 여자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약간의 물이었습니다. 그 물에서 나는 자식과 땅과 건강을 기대했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등심초가 바람에 살랑대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노래를 내게 가까이 가져다준 나뭇가지로 가득 찬 어두운 강이었습니다. 나는 차가운 물의 아기 같았던 당신의 아들과 함께 달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나의 시든 가련한 여인의, 불로 애무당한 한 소녀의 상처 위로 서리를 내리고 내가 걷지 못하도록 수백 마리의 새들을 보냈습니다. 난 원하지 않았어요. 잘 들으세요! 난 원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아들이 나의 목적이었습니다. 난 그를 속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의 팔이 나를 파도처럼, 노새가 머리로 박듯이 나를 끌었습니다. 그 팔은 내가 늙었어도, 당신 아들, 그리고 그들의 아들까지 모두 내 머리채를 쥐어뜯었을지라도 언제나, 언제나 나를 끌어당겼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