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하얀 악마>는 자코비언 시대를 대표하는 존 웹스터의 대표작이다. 이탈리아 궁정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다. 실제 사건 개요는 이렇다. 내연 관계이던 비토리아와 브라치아노 공작은 각자의 배우자를 살해한 뒤 파두아로 도피해 결혼식을 올린다. 이에 추기경과 유력 귀족 가문이 살해된 친족의 복수를 위해 두 사람을 쫓는다. 결국 브라치아노 공작과 비토리아 모두 죽게 되었고, 브라치아노의 비서이자 비토리아의 친동생이었던 플라미니오 역시 둘의 불륜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웹스터는 이 사건의 정황이 담긴 여러 기록을 참고해 비극 <하얀 악마>를 완성했다.
<하얀 악마>가 지칭하는 것은 비토리아다. 화려한 언변, 아름다운 외모, 정치적인 수완을 모두 갖췄지만 죄악을 저지르는 데 주저함이 없고 비정한 악마의 면모도 보여 주는 비토리아는 셰익스피어의 이야고처럼 극의 갈등을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가문의 한계와 여성이라는 태생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비토리아는 이탈리아 궁정의 최고 권력자 공작을 쥐락펴락하며 사랑은 물론 부와 권력까지 쟁취한다. 일련의 살인 사건과 브라치아노 공작과의 불륜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재판이 열리지만, 재판에 참석한 귀족들과 재판장의 권위 앞에서도 그녀는 주눅 드는 법이 없다. 떳떳함을 주장하는 그녀의 기백에 오히려 배심원단과 재판장이 제압당하는 분위기다. 이처럼 웹스터는 비토리아를 고결하면서도 악마적인 모순된 인간상의 전형으로 그려냈다. 전통적인 여성상에는 완전히 배치되는 그녀의 등장으로 영국 르네상스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여성 캐릭터가 탄생했다.
여기에 더불어 웹스터는 플라미니오란 인물을 통해 영국 귀족 사회의 한계를 꼬집는다. 한미한 귀족 가문 출신이던 플라미니오는 누이 비토리아를 통해 권력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단연 최고의 사상가인 플라미니오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신분 때문에 출세가 막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영국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출세를 위해 온갖 범죄와 심지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플라미니오에게 웹스터는 계속해서 가장 철학적인 대사들을 부여한다. 끝을 모르는 악행의 대가로 고통스럽게 죽어 가면서 “죽음을 통해 모든 고통을 끝낼 망각의 상태를 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플라미니오는 유난히도 추악했던 실화 사건 이면의 보편적인 진리를 전한다. 이 작품이 웹스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자 셰익스피어 이후 대중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가장 훌륭한 복수 비극의 하나로 인정받는 이유다.
200자평
비토리아는 비정함과 대담함으로 거침없이 금지된 사랑과 권력을 좇는다.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악마적인 잔인함으로 이탈리아 궁정 남자들을 쥐락펴락하던 비토리아는 죄의 대가로 비참하게 죽는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속에 죄악이 깃든 ‘하얀 악마’ 비토리아는 셰익스피어의 이야고처럼 ‘악’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자코비언 시대를 대표하는 극작가 존 웹스터가 이탈리아 실화를 소재로 쓴 비극 작품이다.
지은이
존 웹스터(John Webster)는 1578년에서 1579년 사이에 태어나 1627에서 1634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그가 살았던 런던 교구(St. Sepulchre without Newgate)에서 보관하던 기록이 1666년 있었던 런던 대화재 때 소실되어서 이 기록조차 불확실하다. 스미스필드(Smithfield) 근처 카우 레인(Cow Lane)과 호지어 레인(Hosier Lane)이 만나는 모퉁이에서 마차와 수레 제조업에 종사하던 존 웹스터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브래드브룩(M.C. Bradbrook)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인문주의 문법학교 중 하나였던 ‘The Merchant Taylors’ School’에서 수학했다. 웹스터는 자코비안 시대(Jacobean period)를 대표하는 극작가다. 이 때문에 이 시기 대중 극장의 소위 ‘퇴보’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작가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웹스터야말로 가장 현대적인 르네상스 극작가다. 특히 <하얀 악마>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현대 연극 무대에 올랐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문 연극인들이 관례로 공연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혁신의 본보기이자 현대성을 반영하는 작가로 재발견된 것이다.
한때 존 웹스터는 근세 초기 영국의 드라마 작가 중에서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인물로 평가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의 비극에 담긴 중요한 주제들, 즉 정의의 불확실성, 여성의 성에 대한 사회적 규제, 폭정의 공포, 사회적 지위를 잃고 되찾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타협과 같은 주제 때문에 그를 사회·정치적 현상에 대한 비평가로 부각하기도 한다. 웹스터의 작품들은 19세기에 고딕 소설과 ‘어두운 낭만주의’(Dark Romanticism) 형식의 선구로서 재발견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웹스터는 지적인 상념과 소외감의 화신이 되었다. 특히 20세기 중반에 그의 명성이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이는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유대인 대학살의 악몽이 그가 제시한 매우 음울한 시선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옮긴이
고현동은 충북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털사대학교(the University of Tulsa)에서 셰익스피어와 영국 르네상스 드라마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2017년부터 지금까지 창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의 주된 주제는 르네상스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 특히 군주와 신하 사이의 영적이고 동성 사회적인 관계에 관한 탐구였다. 이후 지금까지 주된 연구 관심 분야는 동서양의 고전문학, 특히 마키아벨리와 맹자에 대한 비교 연구이며, 이와 관련해 고전문학에서 현대성을 발견하고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비교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번역서로는 ≪리어왕≫이 있으며, 최근 번역한 ≪리처드 2세≫도 출간 예정이다.
차례
독자들에게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4막
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변호사 : (라틴어로) 판사님, 이 역병과도 같은 가장 타락한 여인을 보십시오.
비토리아 : (프란치스코에게) 저자는 누구인가요?
프란치스코 : 그대에 대해 항변할 변호사요.
비토리아 : 공작님, 저자가 평소 쓰는 말로 말하게 하시죠.
안 그러면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프란치스코 : 이런, 그대는 라틴어를 알지 않소.
비토리아 : 압니다만, 제 소송을 보려고 온
청중 중에서 절반 이상이
알지 못할 것입니다.
몬티첼소 : (변호사에게) 계속하시오.
비토리아 : 죄송합니다만,
저의 혐의에 대한 심리가 모르는 말 때문에
모호하게 진행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이 저를 향한 기소 내용을
청취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103쪽
플라미니오 : 잠깐 빛을 내는 다 쓴 초처럼 회복하지만,
나는 곧 꺼져 버리리.
성촉절에 런던탑에 갇힌 사자들처럼 되고 싶다면,
권력자를 섬기는 이들 모두 노파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를 기억하시오, 음울하게 남아 있는
겨울철 날들이 두려워 햇빛이 빛나면
슬퍼하는 전통을 말이오.
그래도 내 죽음에 교훈이 될 만한
것들이 있으니 좋군.
내 삶은 검은 납골당이었어. 난 영원히 지속하는
감기에 걸렸지. 절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내 목소릴 잃었고. 잘 있거라, 명예로운 악당들아!
바쁘기만 했던 삶의 일들이 가장 덧없어 보이는구나.
만족할 줄 아는 삶은 영원한 안식을 낳건만,
성공하려 애쓰는 삶에는 그저
죽음의 고통만 남으니까.
거칠게 아첨하는 종으로 내 죽음 알리는 소리를
내지 마시오. 천둥아, 쳐라, 내 작별 인사에
맞춰 큰 소리로 쳐라. (죽는다.)
-2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