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44∼1889)는 영문학사에서 17세기의 대시인 밀턴 이후 가장 높이 평가되는 종교 시인이다. 그는 평생 자신을 시인이라기보다는 가톨릭 사제로 여겨 신앙 본분에 충실하며 살았고 시는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시적 재능의 발현으로 수확한 일종의 신앙적 결과물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제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사제 수련을 받던 7년여 기간을 제외하면 평생 시 쓰기를 계속했고 그러는 동안 새로운 시를 실험하고 창작함으로써 동시대 시인들의 전통적 시법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시학을 구축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 후반기의 예술적 상황에서 그의 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벽’이라고 무시되었고, 결국 그는 평생 단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했다. 종종 잡지에 기고한 그의 시들은 ‘난해하다’는 이유로 게재가 거부되었고,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문학 동지였던 시인 로버트 브리지스(Robert Bridges)도 그의 시를 두고 ‘희한하다’는 비호의적 평가를 내렸다. 그럼에도 홉킨스는 자신이 쓴 시들을 꾸준히 브리지스에게 보내 평가를 요구하곤 했다. 브리지스는 이 시들을 모아 두었다가 홉킨스가 죽은 지 29년 후인 1918년 자신의 견해를 담은 서문과 헌시를 첨부해 ≪제라드 맨리 홉킨스 시집(Poems of Gerard Manley Hopkins)≫을 출간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브리지스가 출간한 홉킨스의 첫 시집은 750부가 발행되었으나 이후 10년 동안에도 다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가 열정적인 서문과 함께 두 번째 홉킨스 시집을 출간했을 때 비평계는 그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시집은 매우 반응이 좋아 단기간에 10회나 출판을 거듭했다.
홉킨스의 시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모더니즘 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인이며 비평가였던 루이스(C. D. Lewis)는 현대시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작가로 오언(Wilfred Owen), 엘리엇(T. S. Eliot), 그리고 홉킨스 세 사람을 지목했으며, 비평가 리비스(F. R. Leavis)는 홉킨스를 두고 “지금껏 가장 뛰어난 기교 창안자의 한 사람이며 일류 시인”이라고 극찬하고 그를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일부 다른 비평가들은 그가 남긴 많지 않은 작품들만으로도 홉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시인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테니슨(Alfred Tennyson), 그리고 아널드(Matthew Arnold)에 필적하는 위대한 시인이라고 예찬했다. 그의 시에 대한 당시 반응은 이 시기에 발간된 ≪페이버 현대 시집(The Faber Book of Modern Verse)≫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편집자인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여기에 <도이칠란트 호의 난파> 전편을 포함한 홉킨스의 시 13편을 수록한 데 반해, 예이츠의 시는 8편, 엘리엇의 시는 5편을 수록했다. 1948년 가드너(W. H. Gardner)는 매우 치밀한 연구를 거친 끝에 ≪제라드 맨리 홉킨스 시집(The Poems of Gerard Manley Hopkins)≫ 제3판을, 1967년에는 홉킨스의 독자 및 연구자들이 최근까지 정전으로 사용해 온 제4판을 출간했다. 가드너는 여기에 홉킨스의 완성 작품 외에도 그의 노트 등에서 발견된 미완성 시, 단편적인 시행, 라틴어 및 그리스어로 쓰인 시 등 모두 183편을 수록하고 권미에 풍부한 주석도 첨부했다. 1974년엔 국제 홉킨스 학회(International Hopkins Society)가 정식 출범했고 계간지 ≪홉킨스 쿼터리(Hopkins Quarterly)≫를 통해 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지금까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200자평
홉킨스는 살아생전 단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캐럴 루이스는 그를 현대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평했고 비평가 리비스는 “지금껏 가장 뛰어난 기교 창안자의 한 사람이며 일류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시대를 너무나 앞서 나갔던,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종교 시인 홉킨스의 시를 모았다.
지은이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는 1844년 7월 28일 런던 근교의 스트랫퍼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덟 남매 가운데 맏이였으며, 그의 가족은 영국 성공회의 고교회파에 속하는 경건한 교인들이었다. 그는 10세부터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하이게이트 스쿨(Highgate School)에서 공부했는데 이 기간 동안 대학 진학을 위한 그리스어와 라틴어 중심의 학업에 열중하면서 꾸준히 시를 썼고 장차 시인이며 미술가인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와 같은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1863년 4월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연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자연 현상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그는 또한 후일 영국의 계관 시인이 된 로버트 브리지스와 자신의 가톨릭 개종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딕비 돌번(Digby Dolben)과 우정을 쌓았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고전 문학, 역사, 철학, 성서, 논리학 등을 공부했는데 조엣(Benjamin Jowett), 그린(T. H. Green), 페이터(Walter Pater) 등으로부터 세심하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 그의 종교적 신념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1864년부터 그는 가톨릭교회의 성체 성사와 신의 현존 교리에 강하게 이끌렸는데, 여태까지 그가 준봉해 온 국교인 성공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라고 할 “성체 성사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지 않는 “모호하고, 위험하며, 비논리적인” 교회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가톨릭의 현존 교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1866년 그로 하여금 성공회에서 받던 고해성사를 스스로 중단하게 했고 그는 학위를 받은 후 즉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성공회 사제였고 뛰어난 설교로 명성이 자자했으나 1845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옥스퍼드 운동’의 대부 뉴먼(John Henry Newman)을 만났고, 그는 홉킨스를 지체 없이 가톨릭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홉킨스의 개종은 그의 가족과 절친한 국교도 친구들에게 커다란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다음 해인 1867년 6월 그는 고전학에서 수석의 명예를 안고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뉴먼이 설립한 버밍엄의 오라토리 스쿨에서 고전을 가르쳤는데 가톨릭 사제성소(司祭聖召)를 진지하게 생각하던 그는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1868년 예수회 입단을 청원했다. 이때 그는 시 쓰는 일이 성직의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창작을 중단하고 지금까지 쓴 시들도 소각했다.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한 첫 과정인 ‘수련 수사’가 되어 예수회의 만레사 하우스에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 수련≫에 따른 30일간의 엄격하고 긴 피정을 마친다. 수련 수사가 된 지 2년 후인 1870년 9월 8일 그는 예수회원으로 서원하며 랭커셔의 스토니허스트에서 3년 과정의 철학 공부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로만 칼라와 검정색 수단을 착용하게 된다. 이 동안에도 그는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그로부터 얻는 기쁨을 꾸준히 일기로 기록했으며 강렬하고 독창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해 나갔다. 1872년 그는 피터 롬바드(Peter Rombard)의 ≪문장론≫에서 던스 스코터스에 관한 글을 읽고 거기에서 ‘인스케이프’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확고한 이론적 근거를 발견한다. 1873년 그는 로햄튼에서 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때 예수회에 대한 심한 반감으로 관계가 소원했던 로버트 브리지스와 다시 교류를 시작한다. 1874년 8월 그는 북웨일스의 성 보노 대학에서 4년 과정의 신학 공부를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웨일스의 아름다운 자연에 반하고 웨일스어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크게 매료되며 웨일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홉킨스의 예술적 침묵은 한 사건에 의해 종지부를 찍게 된다. 1875년 12월에 템스 강 하구에서 독일 여객선 도이칠란트 호가 좌초되어 다섯 명의 수녀와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해난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대학 총장이던 제임스 존스 신부는 홉킨스에게 그 사건을 기리는 시를 썼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고 홉킨스는 7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그의 대작 <도이칠란트 호의 난파>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이듬해인 1876년 봄에 완성해 예수회 월간지 ≪먼스(The Month)≫에 기고했으나 난해하다는 이유로 출판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1877년은 <하느님의 장엄>, <봄>, <황조롱이> 등 일련의 주옥같은 자연시들이 쏟아져 나온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는 같은 해 9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아무도 서품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878년 3월 영국 훈련선 유리디시 호가 인근 해역에서 침몰해 317명이 사망하는 대형 해난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이 사건을 기려 <유리디시 호의 침몰>을 써서 다시 ≪먼스≫에 기고했으나 이 역시 출판이 거부되었다. 그는 4월에 스토니허스트 대학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런던 대학 학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지도하며 <5월의 마니피카트>를 창작한다.
1879년 이후 1883년까지 그는 보좌 신부나 임시 업무 등을 맡으며 여러 지역의 가톨릭 성당에서 성직을 수행했는데 사목에는 크게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다양한 체험들을 주옥같은 시로 승화시켰다. 1879년에는 <던스 스코터스의 옥스퍼드>, <빈지의 미루나무들>, <헨리 퍼셀> 등을 썼고, 이듬해인 1880년에는 사목 활동에서 얻은 체험을 통해 <필릭스 랜들>을 썼으며, 오늘날 홉킨스의 가장 애송되는 시 가운데 하나인 <봄과 가을>도 이 시기에 썼다. 이 시기는 사제로서 홉킨스가 가장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던 때였다. 1882년 그는 다시 랭커셔의 스토니허스트 대학에서 고전을 가르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쓴 <납 메아리와 금 메아리>는 그가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1883년 5월 성모의 달을 기념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같은 복되신 동정녀>를 쓰는데 이것은 후에 홉킨스가 쓴 성모 마리아에 관한 시들 가운데 가장 많이 애송되는 작품이 되었다.
홉킨스가 더블린에서 보낸 마지막 삶은 불행했다. 1884년 2월 그는 아일랜드 로열 유니버시티의 연구원으로 임명되고 더블린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그리스어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이 대학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건물은 낡을 대로 낡은 채 예수회에 일임되어 있었다. 그는 과중한 시험과 성적 처리 업무 등에 짓눌려 심한 피로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계속되는 시민 봉기와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 사람들의 적대감, 그리고 조국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소외 의식 등은 해가 갈수록 그를 절망에 빠지게 했다. 1885년 그의 고통은 이른바 ‘어둠의 소네트’, 곧 <‘부육(腐肉)의 위안’>, <‘최악은 없다’>, <‘이방인’>, <‘나는 잠 못 이루며 느끼노라’>, <‘내 마음’> 등과 같은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정서가 담긴 시들을 낳았다. 1886년부터는 우울과 좌절의 고통에서 다소 회복되긴 했으나 그가 더블린에 도착한 지 3년째 되던 1887년 2월 17일자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아일랜드에서 3년째인데 그것은 힘겹고 사람을 지치고 마르게 하는 허비된 세월이었다.” 1889년 그는 <‘주님, 당신은 정말 옳으십니다’>에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예언자 예레미야의 고난에 비유해 표현했고, 같은 해 4월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 <R. B.에게>에서 자신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을 만큼 시적 영감이 고갈되었다고 탄식했다.
홉킨스는 악성 장티푸스에 감염되고 복막염이 겹쳐 1889년 6월 8일 44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임종 때 그는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 나는 내 인생을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더블린의 북쪽에 위치한 글래스네빈 공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가 죽은 지 29년 뒤인 1918년 영국의 계관 시인이던 로버트 브리지스는 홉킨스의 첫 시집 ≪제라드 맨리 홉킨스 시집≫을 런던에서 출간했고, 1975년엔 그의 탁월한 문학적 공적을 기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구역’에 그의 기념 표석이 놓였다.
옮긴이
김영남은 충북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했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영문과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2년부터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과에 재직하면서 학부와 대학원에서 영미시 개론, 17세기 영시, 영미시 세미나, 중세 영문학 등의 문학 과정들을 집중적으로 강의했다. 특히 제라드 맨리 홉킨스를 주 전공으로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홉킨스와 인스케이프의 시학>을 비롯한 홉킨스 관련 논문 30여 편과, 그 밖에 초서, 셰익스피어, 던, 밀턴, 키츠, 시의 이론과 비평 등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92년 성바오로 출판사를 통해 ≪불멸의 금강석≫이란 제목의 홉킨스 시집을 번역 출간했으며, 2010년에는 충북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영미 자연시 대표작 번역 선집 ≪자연과 사람과 시≫를 출간했다. 2012년 퇴직해 현재 충북대학교 명예교수로 중세 영문학 및 홉킨스에 관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차례
초기 시: 1864∼1876
하늘나라 항구
부활절 영성체
도시의 연금사
‘내 기도는 놋쇠 하늘에 부딪쳐’
‘나로 하여금 당신을 맴도는 새 같게 하소서’
중간의 집
나이팅게일
완벽의 옷
논둠
부활절
아드 마리암
로사 미스티카
웨일스의 성 보노 대학 시기: 1877
헌시(로버트 브리지스)
도이칠란트 호의 난파
은경축일
펜마인 풀
하느님의 장엄
별이 빛나는 밤
봄
엘루이 강 계곡에서
바다와 종달새
황조롱이
알록달록한 아름다움
수확의 환호성
새장에 갇힌 종달새
집 밖의 등불
더비셔, 옥스퍼드, 리버풀, 스토니허스트 시기: 1878∼1882
유리디시 호의 침몰
5월의 마니피카트
빈지의 미루나무들
던스 스코터스의 옥스퍼드
헨리 퍼셀
집 안의 촛불
잘생긴 심성
나팔수의 첫 영성체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의 희생
안드로메다
평화
결혼 행진곡을 들으며
필릭스 랜들
형제
봄과 가을
인버스네이드
‘물총새들이 불이 붙고’
리블스데일
납 메아리와 금 메아리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같은 복되신 동정녀
더블린 시기: 1885∼1889
시빌의 잎에서 받은 암시
사람의 아름다움은 무엇을 위해 있나
‘군인’
‘부육(腐肉)의 위안’
‘최악은 없다’
‘이방인’
‘나는 잠 못 이루며 느끼노라’
‘인내’
‘내 마음’
톰의 화관
농부 해리
저 자연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이며 부활의 위안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
‘주님, 당신은 정말 옳으십니다’
‘목자의 이마’
R. B.에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하늘나라 항구
“수녀가 서원을 하다”
나는 가고 싶었습니다
샘물이 마르지 않는 곳
매섭고 빗발치는 우박이 내리지 않는 곳
몇 송이 백합꽃들이 피어나는 들판으로.
해서 나는 있기를 청했습니다
태풍도 오지 않고
녹색 큰 파도가 항구에서 침묵하고
바다의 횡포에서 벗어난 곳에.
별이 빛나는 밤
별들을 보라! 보라, 하늘을 올려다보라!
오, 공중에 앉아 있는 모든 불 사람들을 보라!
환한 도시들, 그곳에 있는 둥근 성채들!
희미한 숲 속 깊은 곳의 금강석 동굴들! 요정들의 눈!
금이, 수금(水金)이 깔린 잿빛의 차가운 잔디밭들!
바람을 맞는 백양나무! 섬광에 타는 공기 미루나무들!
농가에서 깜짝 놀라 떠오르는 눈송이 같은 비둘기 떼!−
아 놀라워라! 모두가 사야 할 것이다, 모두가 경품이로다.
그러면 사라! 입찰하라!−무엇으로?−기도, 인내, 보시, 서약으로.
보라, 보라. 5월 꽃무리가 과수원 가지들에 맺힌 듯하다!
보라! 3월의 꽃이 노란 분칠을 한 버들강아지에 맺힌 듯하다!
실로 이것들이 곳간이요, 그 안에 낟가리를 담고 있다.
점점이 환한 이 울타리는 신랑 그리스도를 안전하게,
그리스도와 그 모친과 모든 그의 성인들을 감싸고 있구나.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의 희생
알록달록 발그레한
볼, 섬세히 곡선을 이룬 입술,
가느다란 금발, 맑은 잿빛
눈, 모두가 조화롭다−
이것, 이 모든 꽃피는 아름다움을
이것, 이 모든 뿜어나는 신선함을
소모할 가치가 있는 동안 하느님께 드려라.
이제 생각과 근육이 모두 더 담대하며
자연의 명령을 받아 우뚝 솟나니,
머리, 가슴, 손, 발, 어깨가
힘차게 고동치고 호흡한다−
이 한창때의 즐거움은
장난감이 아니라 도구로 의도된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쓰시는 대로 맡겨 두라.
마음속에 든 도량과 안목과
학식과 통달은
비단 재 안에 식지 않고 있고,
껍질 속은 익을 대로 익었다−
죽음이 빗장을 반쯤 올렸고,
지옥이 곧 채 가려 하고 있으니
지체 없이 이 모두를 봉헌하라!
‘내 마음’
내 마음에게 더 많은 연민을 갖자. 이제부터는
내 슬픈 자신에게 친절하게, 자선을 베풀며 살자.
이 고통 받는 마음을 이 고통 받는 마음으로
고통을 주면서 살지 않기로 하자.
나는 내가 얻지 못할 위안을 찾아다니며
나의 위안 없는 내면을 더듬고 있나니, 마치 먼눈이
어둠 속에서 낮을 찾을 수 없음과 같으며, 목마름이
물뿐인 세상에서 결코 궁극의 바람을 이루지 못함 같구나.
혼이여, 자아여, 오라, 가엾고 평범한 자아여, 내가 여윈 네게
충고하노니, 잠자코 있어라. 잠시나마 다른 데로 생각을
돌려라. 위안이 뿌리내릴 여유를 주어라. 기쁨이 커지게 하라,
비록 그때와 그 크기는 하느님이 아시지만. 그분의 미소는
짜낸다고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예기치 않던 순간에−산과 산 사이로
알록달록한 하늘이 나타나듯−가는 길을 아름답게 밝혀 주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