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갯머리 서책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여름은 밤. 달이 뜨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이 근사하다. 반딧불이가 한 마리나 두 마리 희미하게 빛을 내며 지나가는 것도 운치 있다. 비 오는 밤도 좋다.
가을은 해 질 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세 마리나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 지어 날아가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광경은 한층 더 정취 있다. 해가 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겨울은 새벽녘. 눈이 내리면 더없이 좋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도 멋있다. 아주 추운 날 급하게 피운 숯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이때 숯을 뜨겁게 피우지 않으면 화로 속이 금방 흰 재로 변해 버려 좋지 않다.
≪베갯머리 서책≫, 세이쇼나곤(淸少納言) 지음, 정순분 옮김, 3쪽
세이쇼나곤은 누구인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여성 문인이다. 966년경 중류 귀족 기요하라노 모토스케(淸原元輔)의 딸로 태어났다. 993년 데이시 중궁의 여방(女房)으로 입궐해 후궁 문화를 이끌었다.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왜 부친과 성이 다른가?
세이쇼나곤은 본명이 아니라 여방 이름이다. 당시 여성은 황족을 제외하고는 이름이 없었다. 궁중에 출사해 여방으로 일하게 되면 남자 가족의 이름이나 관직명을 따서 지은 여방명을 사용했다.
여방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상궁과 비슷하다. 오늘날로 치면 비서 같은 역할로, 귀인을 옆에서 보좌했다. 학문이 뛰어나고 궁중 예법에 밝은 여성이 주로 임명되었다. 세이쇼나곤은 이치조 천황의 비 데이시 중궁을 모셨다.
≪베갯머리 서책≫은 어떤 작품인가?
일본 최초의 수필이다. 작자가 궁중에서 생활하며 보고 듣고 생각한 일들을 기록했다.
일기와는 다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때그때 꾸준히 기록한 글이 아니다. 일기처럼 있었던 일을 사실적으로 그린 곳도 있지만 인상 깊은 장면만 골라 단편적으로 재구성한다. 특정 주제에 따라 사물들을 나열하기도 하고, 어떤 사실에 대한 생각을 쓰기도 한다.
제목이 왜 ‘베갯머리 서책’인가?
원어로는 ‘마쿠라노소시(枕草子)’다. 베개 근처, 즉 아주 가까운 곳에 지니며 소소한 일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다.
표현의 특징은 무엇인가?
‘오카시(をかし)’ 미의식이다. ‘오카시’라는 형용사로 끝나는 문장이 170개다. 문장 중간에 쓴 것까지 합하면 400회나 사용했다. 끝에서 그 말을 생략한 문장도 많다. 인용문에 있는 ‘봄은 동틀 무렵(春は、曙)’이 그렇다. 원래 문장은 ‘봄은 동틀 무렵이 멋있다’다.
‘오카시’가 ‘멋있다’는 뜻인가?
의미가 광범위하다. 본문에서는 ‘나쁘다(わろし)’나 ‘점점 심하게(うたて)’의 반대말로 사용했다. 특정한 조건에서 호감을 나타낼 때 쓰는 형용사다.
특정한 조건이란?
원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이 특별하게 느껴질 때다. 말하자면 일상성 속에서 비일상성을 느낄 때 맛보는 감동을 오카시라고 표현한다.
오카시를 어떻게 느낄 수 있나?
대상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라. 객관적이고 관조적인 태도로 섬세하게 관찰하다 보면 아름답고 즐거운 것뿐 아니라 불쾌한 것, 불행한 일에서도 재미와 흥미를 찾을 수 있다.
불행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인가?
그렇다. ≪베갯머리 서책≫에는 데이시 중궁의 덕망 있고 인자한 미소, 자유분방한 중궁전 안에서 재치와 기지를 발휘하는 세이쇼나곤, 화목한 모습에 이끌려 저절로 즐거워지는 남성 귀족들과 이치조 천황의 유쾌한 웃음 등 즐겁고 화기애애한 모습이 그려진다. 이것은 작자가 오카시 미학에 따라 의도적으로 선택 묘사한 것이다.
실제 삶은 불행한가?
데이시 중궁의 가문은 몰락한다. 부친 미치타카가 사망하고 숙부 미치나가가 실권을 잡으면서부터다. 중궁 자리를 미치나가의 딸 쇼시에게 빼앗긴 데이시는 결국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다.
세이쇼나곤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주군을 기리기 위해서다. 자신을 알아주고 늘 믿어 준 중궁의 총명하고 온화하며 고귀한 모습을 후세에 널리 알리려 했다.
≪베갯머리 서책≫ 이후 일본 문학은 어떻게 달라졌나?
남성의 전유물이던 문학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딱딱하고 격식에 치우친 사실 기록이 아니라 자유롭고 감성적인 수필과 일기 문학이 발달한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작품은?
세이쇼나곤의 문학적 라이벌이자 ≪겐지 모노가타리≫의 작자인 무라사키시키부의 ≪무라사키시키부 일기≫를 읽어 보라. 당시 궁중과 정계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청령 일기≫, ≪이즈미시키부 일기≫, ≪사라시나 일기≫, ≪사누키노스케 일기≫도 차례로 읽다 보면 헤이안 시대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
정순분이다.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다.
2835호 | 2015년 12월 30일 발행
겨울은 새벽녘
정순분이 옮긴 세이쇼나곤(淸少納言)의 ≪베갯머리 서책(枕草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