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문집
2358호 | 2014년 12월 16일 발행
왕궈웨이의 ≪정암 문집≫
류창교가 옮긴 왕궈웨이(王國維)의 ≪정암 문집(靜庵文集)≫
틀리지 않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큰 악은 이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둘은 친구이며 적이고 초면의 관계이기도 하다.
왕궈웨이는 앎과 함의 관계를 관찰한다.
동양과 서양의 지식이 만나 근대의 문을 연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자신의 삶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하소연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서 보답을 구하지 않는다 하자. 그를 진실로 가까이 하고 귀중하게 대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의 행위를 합리적이라고 하겠는가? …가령 한 악인이 있다 하자. 그는 비열한 술책으로 부귀를 쟁취하고, 심지어 국가를 훔쳐 소유하고, 그런 뒤에는 갖가지 기만책으로 그 이웃 나라를 잠식하고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이 일을 이루는 데 강인하고 과감하고 흉포해 계획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자르고 없애고 죽이고 베어 버려 돌아보지 않고, 억만의 백성을 칼과 톱과 포승으로 몰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정의와 인애의 관념을 잃지 않아 그의 무리와 자신을 도와준 자들에게는 두터이 보답해 인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의 최대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거동이 완전히 이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정암 문집(靜庵文集)≫ <2. 이치에 대한 풀이(釋理)>, 왕궈웨이(王國維) 지음, 류창교 옮김, 68~70쪽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理)’라는 글자에 윤리학적 의미가 있는가를 따진다.
이 글자는 어디서 온 것인가?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이(理)는 옥(玉)을 다듬는 것이다. 옥(玉)의 의미에 이(里)의 소리를 따랐다”고 했다. 옥을 다듬고 쪼개듯 사물을 분석하고 유추하는 작용, 혹은 사물 중에 이렇게 분석할 수 있는 것을 ‘이’라고 했다. 영어의 ‘Reason’이 라틴어의 ‘Ratio’, 즉 ‘사색’에서 온 것과 마찬가지다.
뜻이 무엇인가?
넓게는 ‘이유(理由)’, 좁게는 ‘이성(理性)’을 뜻한다.
이유란 무엇인가?
사물이 모두 각기 존재하는, 자기 충족 이유다. 칸트에 따르면 “모든 명제는 반드시 그 논거가 있”고, “모든 사물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이는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이다. 그것이 우리 지력의 가장 보편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뭔가?
사람만이 가지는 특별한 논리적 사유 능력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다.
‘이’는 윤리인가?
아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지력의 일종이다. 이성(理性)의 작용은 진위(眞僞)에만 관여한다. 선악에 관여하지 않는다.
성리학이 ‘이(理)’를 ‘욕(欲)’의 반대 개념으로 본 이유인가?
그렇다. 고대에는 참[眞]과 선(善)을 구별하지 못했다. 정자(程子)는 “사람의 마음에 앎이 있지 않음이 없는데, 인욕(人欲)에 가려지면 천리(天理)를 잃는다”고 했다. 이때 천리는 윤리학의 가치, 즉 선(善)이란 뜻이다.
플라톤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그는 인성(人性)을 삼품(三品)으로 나눈다. 첫째 기욕(嗜慾), 둘째 혈기(血氣), 셋째 이성(理性)이다. 기욕과 혈기를 절제함으로써 극기와 용맹[勇毅], 이 두 덕을 이루는 것이 이성의 임무다. 이성이란 지식과 도덕이 귀착하는 곳이라 여겼다.
실제로 지식과 도덕이 이성에 귀착하는가?
위의 예문을 보라. 큰 악은 이성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큰 악은 이성과 동맹해 발생된다. 루소는 ≪에밀≫에서 이미 덕성과 이성의 차이를 진술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덕성의 근원은 인성의 합리적 부분에 존재하지 않고 그것의 비이성적인 부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키케로가 이성이란 죄악이 필요로 하는 수단이라고 한 뜻도 이것을 말한다.
이성이 선악을 통제하지 못하는가?
‘이’가 이유라면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동기’가 된다. 동기가 바른지 아닌지에 따라 행위의 선악이 결정될 뿐, 동기 자체는 빈자리이지 고정된 이름이 아니다. 선(善)도 한 동기이고 악(惡)도 한 동기가 된다.
‘이’를 이성으로 보면 어떤가?
마찬가지다. 선을 행하는 것도 이성으로 말미암고, 악을 행하는 것도 이성으로 말미암는다. 이성은 다만 행위의 형식이 될 뿐, 행위의 표준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왕궈웨이는 누구인가?
근대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 고증학자, 국학자다.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호는 예당(禮堂), 영관당(永觀堂), 관당(觀堂), 영관(永觀) 등이다. 1877년 태어나 한학을 공부했고 일본 유학을 거쳐 철학, 미학, 문학, 역사, 지리, 금석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의 스승이 되기도 했으나 1927년 쿤밍호에 투신, 자살했다.
≪정암 문집≫은 어떤 책인가?
왕궈웨이가 직접 편찬 교정해 출간한 첫 학술 문집이다. 1905년 상무인서관에서 출판했고 사후에는 ≪왕궈웨이 유서(王國維遺書)≫에 편입되었다.
내용은?
그가 주편을 맡고 있던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에 발표한 글 12편을 모은 것이다. 주로 철학과 교육학에 대한 글들이다. 당시 공부하던 서양 철학을 바탕으로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의 설을 끌어와 철학, 미학, 문학, 교육학 등에 대한 견해를 드러냈다.
이 책은 그의 연구 노정에서 어디쯤 위치하나?
초기 학술 연구의 산물이다. 국학대사이자 천재 지식인으로, 넓고 깊고 정예로운 학문 세계를 건설해 갈 그의 초기 사상이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그는 처음으로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 사상을 소개하고 이를 근거로 정주이학(程朱理學)을 비판한다. 또 근대 중국 최초로 서양 철학과 미학 그리고 문학 관점과 방법을 운용해 중국 고전 문학을 평론했다. 그의 철학과 미학, 문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렇게 중요한 책이 왜 그동안 한국에 번역되지 않았나?
이 문집에 실린 글은 1900년대 초기에 쓰인 것으로 완전한 백화문도 고문도 아니다. 동서고금의 철학·미학 용어, 서양 인명과 사건 등이 별도의 주석 없이 언급된 경우가 많아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번역본에는 원문의 소박함을 그대로 드러내되 자세한 주석과 해제를 추가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누구를 만날 수 있나?
동서고금의 문화가 교차하던 근대 중국의 한 지식인 청년이다. 그의 치열한 고민과 사유를 독자들이 함께하길 바란다.
당신은 누구인가?
류창교다. 서울대 중문학과 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