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 육필시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맑은 가을볕 온 들에 환하다./ 또 한 해 가뭄 장마 병충해 다 이기고/ 품앗이 이웃들 함께 나락 베는 날,/ 우리의 눈물처럼 애틋이 타오르는/ 논두렁의 방울방울 들국꽃이 새하얀하고/ 산들산들 산들바람은 지극히 불어/ 땀에 젖는 우리의 피로를 말끔 씻는다./ 그렇다, 지난 봄 여름 그토록 허덕여/ 우리 오늘 오진 나락 깍지 무게에 취하여/ 싹둑싹둑 날렵히 나락 베는 이 기쁨은/ 날갯짓 세찬 새 되어 하늘 깊숙이 치솟는다./ 가을볕 너무 맑아 차라리 서러운데/ 추수도 전에 나온 영농자금상환서며/ 막내 공납금 걱정에 어머니는/ 지레 구시렁거리는 소리로 한나절이지만/ 마음 더욱 그래도 뿌듯하고 든든한 것은/ 막걸리 잔 서로 돌리는 이웃들의 넉살과/ 들 가득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 소리들,/ 낫질을 한다, 우두둑거리는 뼈마디 세우며/ 천 날 만 날 빚과 허기에 지친 우리 농사꾼/ 슬픔도 노염도 일으키며 낫질을 한다./ 베는 게 나락만이 아닌 이 독한 그리움으로/ 날랜 낫질도 날렵히 나락 베는 날,/ 앞산 뒷산 사방의 단풍 드는 나뭇잎들은/ 저 노랗고 붉은 박수갈채를 끝없이 쳐 대고/ 맑은 가을볕은 더욱 맑아 온 날을 닦아/ 저기 저렇게 하늘도 천년으로 시퍼렇다.
≪고재종 육필시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152~155쪽
함께 나락 베는 날,
베는 게 나락만은 아니다.
빚과 허기에 지친 눈물도 서러움도
싹둑, 싹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