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작품집
2594호 | 2015년 5월 19일 발행
김성한의 바비도와 양심의 조건
김학균이 엮은 ≪초판본 김성한 작품집≫
양심과 정의의 조건
화형대 앞에서 회유가 들어온다.
죽고 싶은가, 살고 싶지 않은가?
바비도가 대답한다.
꼭 죽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착같이 살고 싶지도 않다.
옳은 것은 언제나 한가운데서만 자란다.
가난한 자 괴로워하는 자를 구하는 것이 크리스도의 본의일진대, 선천적으로 결정된 운명의 밧줄에 묶여서, 래틴말을 배우지 못한 그들이 쉬운 자기 말로 복음의 혜택을 받는 것이 어째서 사형을 받아야만 하는 극악무도한 짓이란 말이냐?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크리스도의 분신이니 신성하다지마는 아무리 보아도 빵이요 먹어도 빵이다. 포도주 역시 다를 것이 없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거짓이 아니고야 어찌 인정할 도리가 있을 것이냐? 무슨 까닭에 벽을 문이라고 내미는 것이냐? 절대적으로 보면 같은 수평선상에 서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꾸며낸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이냐?
바비도는 울화가 치밀었다.
<바비도>, ≪초판본 김성한 작품집≫, 김성한 지음, 김학균 엮음, 162~163쪽
바비도가 누구인가?
재봉 직공이다.
재봉사가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는가?
그는 영역 복음서 비밀 독회에 다닌다.
비밀 독회라면 언제 이야기인가?
1400년대 영국이다. “사제는 토끼 사냥에 바쁘고 사교는 회개와 순례를 팔아 별장을 샀다.” 교회가 타락해 사제들의 비리가 만연하던 시절이다.
바비도는 목숨을 유지하는가?
영역된 성경을 읽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이단으로 지목받는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역 성경을 읽는 것은 잘못이요, 성찬 때 먹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화체설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비도는 자기 생각을 지킨다.
그의 믿음은 무엇인가?
“어저께까지 옳았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이 옳던 것이 하루아침에 정반대인 극악으로 변하는 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회유가 없는가?
돌을 맞고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태자 헨리가 그를 찾는다.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바비도는 “구태여 죽구 싶은 것두 아니지만 악착같이 살구 싶지두 않”다고 대답한다. 화형 당한다.
화형의 대가는 뭔가?
거짓된 종교에 대항한 인간의 숭고한 투쟁은 태자의 생각도 바꾼다. 그는 바비도에게서 살아 있는 양심을 발견한다. “나는 오늘날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슷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네가….”
<바비도>에 대한 당대의 평은?
1956년 사상계사가 제정한 동인문학상의 첫 회 수상작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념’을 주목했다. “이 작품은 예술적인 동시에 현대 우리 사회에게 주는 한 개의 경종”이라고 주요한은 말했다.
김성한과 ≪사상계≫는 어떤 관계인가?
≪사상계≫ 초기에 발행인 장준하는 친분을 이용해 필자를 선정했다. 그 결과 북한 출신 지식인들이 ≪사상계≫에 참여하게 된다. 함남 출신인 김성한은 1955년 5월 호부터 ≪사상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사상계≫는 어떤 잡지였나?
1952년 장준하를 중심으로 창간된 잡지다. 월남한 서북 지역 지식인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뚜렷한 이념성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이념성인가?
민족주의와 기독교 정신이다.
≪사상계≫와 기독교 정신은 어떤 관련이 있나?
서북 지역은 기독교를 일찍부터 받아들였다. 기독교는 민족주의와 융합해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미션 학교인 신성학교 출신인 장준하와 이 지역 출신 인맥들 역시 기독교 정신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사상계≫ 발간 초기부터 이런 성향이 드러난다.
김성한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정직한 양심과 올바른 이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절대 이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종교야말로 타락한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타락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 아닌가?
당신은 누구인가?
김학균이다. 서울시립대 글쓰기센터 연구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