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육필시집 꽃
순명(順命)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들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 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 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김춘수 육필시집 꽃≫, 182~183쪽
사라질 때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
자신의 천명을 따라
소리 없이 무너진다.
그럼으로써 영원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