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세상의 끝
가족극장 4. 장뤼크 라가르스Jean-Luc Lagarce의 <<단지 세상의 끝Juste la fin du monde>>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어느 일요일, 10년 전 집을 떠난 장남이 돌아온다. 어머니, 여동생 쉬잔, 동생 앙투안 내외가 모인다. 식구들은 쉼 없이 비난과 원망을 쏟아내고 돌아온 아들은 자신의 말을 가슴에 묻은 채 다시 집을 떠난다. 시한부 삶의 루이, 그 자리를 채워야 했던 앙투안. 죽으면 그의 세상은 끝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루이 아마 열흘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어디에 있었더라?−
열흘 전이었던 것 같다,
여기로 와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오직 단 한 가지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을 거다.
난 일어났다,
그리고 식구들을 보러 가야겠다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속으로 그랬다,
그런 다음, 며칠이 지났고,
스스로 만들어 낸 안 가도 되는 훌륭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더 이상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열흘 전,
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차분하게, 편안하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1년 만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렇게 편안하게 자지 못한 지 오래되었고, 매일 아침, 머릿속으로만,
시작해야지, 또다시 시작해야지 해 왔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난 잠에서 깨어났다, 차분하게, 편안하게,
이상하고도 선명한 그런 생각으로,
그런 생각을 내가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상하고도 선명한 그런 생각이란
내 부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인생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모두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내 부모와 내가 가까이한 사람들 또는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
과거 내 아버지, 애써 기억해 보자면,
오늘 여기서 보는 내 어머니, 내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까지,
그리고 나중에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 모든 사람들이 언젠간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과거에도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생각,
그래서 모두가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엔”
나에 대해 절망하고 지쳐서, 모두가 날 언제나 포기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건 내가 날 포기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잠에서 깼을 때 그런 느낌이었다,
−한순간, 잠에서 빠져나오니, 모든 게 투명해 보인다, 투명해서 붙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모두들 언제나 날 포기했다는 그런 느낌,
조금씩 조금씩,
나 스스로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 홀로 고독하게 있도록 놓아두는 그런 느낌,
왜냐면 아무도 내게 상처를 줄 수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결국 단념해야 했겠지,
모두들,
날 곁에 두려고 많이 노력했고,
나더러 곁에 있으라고 애써 그런 말을 했지만,
모두들
어떤 식으로든,
나를 포기한다, 그들은 나를 포기했다,
그건 내가 그들의 소망을 절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이제 내 걱정은 하지 않는 척하며, 날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날 더 많이 사랑하는 거라고 그들이 이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내가 불평했던 그 사랑의 결핍이 언제나 날 비겁하게 만든 유일한 이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의 결핍은 언제나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더 상처받게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마디 할 수도 없고 나한테 한 마디 할 의무도 없는
죽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나를 그들은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상하고도 절망적인 그리고 계속 사라지지 않는 생각으로 난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
앙투안 난 양보해 왔어.
양보해야만 했지.
항상 양보해야만 했어.
오늘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건 아주 작은 일이지,
그리고 재미있는 건,
극복할 수 없는 불행인 척할 수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걸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지,
난 양보해 왔어, 형한테 내 자리를 양보해 왔어, 보여 줘야만 했어,
다들 내게 반복해서 하던 말,
난 “어른스러워져야” 했어.
될 수 있는 한 소리를 내지 말아야 했고, 형에게 자리를 내줘야했고, 형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됐지,
그리고 조금 연장된 형의 생존을 위해 벌어지는 스펙터클을 즐겨야 했지.
우리는 지켜보았어,
지켜보았고, 그 불행처럼 보이는 것에 스스로 책임을 느꼈지.
왜냐하면 형의 불행은 단지 불행일 뿐,
형도 나처럼 그 사실을 알지,
엄마, 여동생도 그걸 알고 있어,
그리고 오늘은 모든 사람들이 이 게임을 분명하게 보고 있지,
(형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 남자들, 여자들, 다 알고 있어, 형이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들은 형의 거짓말을 알아챘을 거야, 내가 틀렸다고 생각지 않아)
형의 불행은 형이 늘 가지고 있는 방식이고,
늘 가지고 있던 방식이고, 앞으로도 가지게 될 방식이겠지,
−왜냐하면 원한다고 해도, 형은 벗어나지 못할 거고, 자기 역할이 되어 버린 거지−
형은 속일 줄 알았고,
자기를 보호하고 도피할 줄 알았어.
형은 결코 상처 받은 적이 없어,
그 사실을 아는 덴 몇 년이나 결려야만 했어,
형은 상처 받은 적이 없어,
고통스럽지 않아,
−만약 형이 고통스러웠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지, 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
형의 불행은 반응하는 방식일 뿐이야,
반응하는 방식이라는 건,
다른 사람들이 형 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거지.
그게 형의 시스템이고, 형의 모습이야,
충분히 바보 같아 보이는 사람들처럼 얼굴에 불행의 가면을 쓰고 있지, 형은 불행을 선택했고 그게 도움이 되니까 간직한 거야.
이제 우린 스스로 만든 불행,
서로 비난할 게 하나도 없어,
다른 사람들이 형한테 상처를 입혔는데,
다들 그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말하는 거야,
점차, 그건 내 탓이 되었어, 그게 내 탓이라고만 하지.
우리가 형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럼 날 너무 사랑해야 했나 보지,
그리고 나한테 주지 않은 걸 내게서 가져가려고 했지,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면서,
그래서 난 불평 한마디 없이
아주 착하게 있어야 했지,
미소 짓고, 즐기며,
만족하고, 너무 행복해하며,
그러니까, 너무 행복하다는 단어에 맞게,
반면에, 설명하긴 어렵지만, 형은, 항상, 불행으로 힘들어하고 있었지,
그래서 그 모든 노력과 상관없이, 누구도 형의 불행을 잊게 해 주거나 도와줄 수는 없었지.
형이 떠났을 때, 우리를 떠났을 때, 우리를 버렸을 때,
우리에게 한 어떤 결정적인 말은 우리 뇌리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건 계속 내 책임이었지,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며, 형을 걱정해야 했어, 멀리서 형 걱정을 해야 했지,
그리고 다시는 형에게 반대하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고, 다시는 형을 반대하는 단어를 생각조차 못하고, 바보처럼, 형을 기다리며, 여기 그냥 있어야 했지.
<<단지 세상의 끝>>, 장뤼크 라가르스 지음, 임혜경 옮김, 45~48, 125~130쪽
장뤼크 라가르스Jean-Luc Lagarce, 1957~1995
프랑스 에리쿠르 출신 작가 겸 연출가. 부모가 푸조 공장 노동자로 있던 발랑티네에서 유년을 보낸 후, 브장송에서 철학과 연극을 수학했다. <서양에서의 연극과 권력>으로 브장송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국립연극원 동기들과 아마추어 ‘마차극장’을 만들어 극작·연출을 하다가 연극에 투신한다.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안 것은 1988년이지만 이전부터 질병·죽음·실종에 대한 테마를 다루었다. <페스트가 있던 해의 막연한 기억들(Vagues Souvenirs de l’année de la peste)>(1982)에서 그것을 암시한다. 1995년 9월 30일, 무대 연습 중에 37세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희곡은 언어의 무의미와 부조리에 도전했던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현대극 경향에 서사와 시를 보탰다. 무의미 속 의미를 탐색한다. 새로운 연극 언어를 찾아 끝없이 연구한 작가로서 동시대 프랑스 연극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상대방의 자리(La place de l’autre)>(1979),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J’étais dans la maison et j’attendais que la pluie vienne)>(1994)를 비롯 희곡 25편, 비디오 영화 2편, 소설 3편 등 짧은 생애 집중된 창작욕을 펼쳤다.
임혜경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후 프랑스 몽펠리에 제3대학, 폴 발레리 문과대학에서 로트레아몽 작품 연구로 프랑스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숙명여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이고 문과대 학장이며 극단 프랑코포니 대표다. ≪이윤택 희곡집≫ ≪한국 현대 희곡선≫ 등을 불어로 공역해 한국문학번역상을 받았다. 장뤼크 라가르스의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상대방의 자리≫ 등 다수의 국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