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령의 사진
국내 첫 선, 외젠 이오네스코 단편 소설집 <<대령의 사진>>
사람은 왜 사람을 죽일까?
극작가로 유명하지만 그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간결하고 핵심을 향해 직선 돌격한다. 인물과 대화와 이미지는 견고하게 연결되어 연극의 입체성과 조형성을 암시한다. <대령의 이야기>는 살인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묻는다. 살인은 인간의 본성일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왜 악마의 뒤에는 항상 천사가 나타나는 것일까?
≪대령의 사진≫은 1962년 갈리마르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단편 소설 <깃발>, <대령의 사진>, <공중 보행자>, <의무의 희생자>, <코뿔소>, <수렁>과 단편 일기 <1939년 봄>을 실었다.
길 왼쪽에도 이제는 집 한 채 없었다. 양쪽 모두 흙투성이의 밭들이었다. 이 길, 아니 이 가로는 전차선로와 함께,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나는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제발 시간이 넘지나 말았으면! 제발 시간이 넘지나 말았으면!”
느닷없이 내 앞에 놈이 나타났다. 틀림없이 그 살인범이었다. 놈과 나의 주위엔 어둑어둑한 벌판뿐이었다. 바람결에 헌 신문지 한 장이 벌거벗은 나무통을 후려치고는, 그대로 거기 붙어 버렸다. 놈의 등 뒤로 저 멀리 수백 미터 지점에서, 석양을 받으며 경찰서 건물들이 옆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근처가 전차 정류장이며, 이제 그곳으로 막 전차가 와닿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내리는 것이 보였다. 길거리인 만큼 아주 좁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그토록 너무 멀리 있으니 내 소리가 들릴 리도
없을 테고. 나는 당장에 전신이 마비되어 발이 딱 얼어붙었다. ‘더러운 자식들, 일부러 나를 이자와 단둘이 마주치게 해 놓았구나! 경찰을 건드려 봐야 곤란을 겪으리라는 걸 알란 말이지!’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두어 발짝 사이에서 빤히 보며 마주 섰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놈을 바라보았다. 놈도 역시 약간 빈정대는 투의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놈은 삐쩍 마르고 약골이고 아주 키가 작고 수염도 깎지 않은 어중간한 나이의 사내로 기운이 나만도 못해 보였다. 낡고 꾀죄죄하며 주머니 귀퉁이가 모두 찢어진 개버딘 양복을 입고, 신고 있는 신은 앞에 구멍이 뚫려 그곳으로 발가락이 삐져나와 있었다. 머리에는 다 해진 볼품없는 모자를 썼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한 손은 바르르 떨며 날이 큼직하고 희끄무레하게 번쩍이는 단도를 들고 있었다.
놈은 하나만 남은 눈, 손에 든 칼날과 똑같은 빛을 내는 똑같은 재료로 만들었나 싶은 차디찬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일찍이 나는 이토록 잔인하고, 이토록 딱딱하고−도대체 왜 그럴까?−이토록 사나운 눈초리는 본 적이 없었다. 아주 빈틈없는 눈, 뱀의 눈이나 호랑이의 눈처럼 꼼짝 못하
게 범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살인범의 눈이었다. 다정한 말이건 점잖은 말이건, 그 어떤 좋은 말로 타일러도 놈을 설복시킬 수 없고, 행복의 약속도 세계에 대한 사랑도 놈하고는 결코 멀며, 아름다움의 힘으로 놈의 뜻을 굽힐 수도 없는가하면, 풍자에 부끄러워할 놈도 아니고, 온 세상의 지혜를 다 모아도 터무니없는 범죄의 공허를 놈에게 깨우쳐 주지 못했을 것이다.
눈썹 하나 없는 그 눈, 강철 같은 그 눈길에 성자들의 눈물을 흘려 덮어도 놈에게는 물기 하나 젖어 들지 않을 것이며, 놈을 위해 수개 부대의 그리스도가 연달아 십자가에 오른다고 해도 허사였을 것이다.
나는 서서히 양쪽 주머니에서 두 자루의 권총을 꺼내어 잠시 조용히 놈에게 겨누었지만 놈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권총을 내리고 두 팔을 스스로 떨어뜨렸다. 무장해제를 당한 것 같은, 절망감 같은 것이 몰려왔다. 그 차디찬 증오와 고집 앞에서, 온통 무자비하고 절대적인 그 잔인성의 무한한 힘 앞에서 총알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알량한 내 기력으로 어떻게 싸울 엄두가 날 것인가?
<대령의 사진> 끄트머리, <<대령의 사진>> 43-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