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곱스카야 공작부인(완역)
러시아 고전 소설 신간 <<리곱스카야 공작부인 (Княгиня Лиговская)>>
27세의 러시아 문학
레르몬토프는 푸시킨 다음으로 사랑받는 러시아 작가다. 대학을 자퇴하고 군인이 된다. 한 여자를 유혹해 사교계의 문을 연 뒤 버린다. 상류층을 비난해 유배를 살고 전투에 승리했으나 황제의 미움을 산다. 27세 때 주위로부터 질시받다가 사소한 시비에 휩싸여 결투를 감행, 죽는다. 이미 천재 시인이 되어 있었고 러시아 리얼리즘의 첫 발을 디딘 뒤였다.
페초린은 잔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안락의자에 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외모에 드러나는 영혼의 상태를 아무리 잘 읽어 낸다 할지라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없겠다. 그는 그 상태로 15분가량을 앉아 있었다. 문득 그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 같기도 하고, 옷깃 스치는 소리 혹은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기도 한 것이 들렸다…. 귀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는 몸을 떨고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어스름에서 무언가 하얀 것, 가벼운 것이 보였다…. 한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정도로 그의 생각은 멀리 있었다. …만일 이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면, 적어도 이 방에서는 떠나 있었던 것이다….
≪리곱스카야 공작부인≫, 레르몬토프 지음, 홍대화 옮김, 14~15쪽
어느 대목인가?
‘자유로운 서술’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냥 읽으면 인물의 외양을 묘사해 성격과 심정을 엿보게 하려는 문장 같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서술자가 “내가”라면서 직접 나오는 곳이 눈에 띈다. 한술 더 떠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없겠다”라는 다소 무책임한 말까지 한다. 요새 신춘문예에서라면 ‘작가 개입, 기법 미숙’이라며 낙방할 만한 요소지만 19세기 작품이라는 점과 레르몬토프의 개성이라는 점을 감안하자.
레르몬토프는 어떤 작가인가?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는 러시아인들이 푸시킨 다음으로 꼽는 작가다.
작품 창작 당시 시대 사정은?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 진압 이후 니콜라이 1세의 숨 막히는 헌병정치 속에서 답답하게 살던 때였다. 레르몬토프는 삶의 전선에 나서자마자 사회의 절망적인 어둠을 보고 사회와 삶, 세계 구조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미완성 작품인가?
1836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837년 1월경에 중단한 것으로 여겨진다. 레르몬토프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다. 1882년, 문학잡지 ≪러시아 소식≫ 1호에 처음으로 실렸다.
서술의 특징은?
전지적 서술자가 인물의 외모와 전기(傳記), 실내 인테리어, 행동 등을 세밀히 묘사한다. 인물의 형상을 전형으로서 구축하고자 한 노력이 두드러진다. 번역 과정에서도 이 부분을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다.
연애소설인가?
그렇다고 하겠다. 1830년대는 시 장르가 차츰 쇠퇴하고 산문이 문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역사소설과 연애소설이 발달했는데, 사교계 남녀의 사랑다툼과 그 속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교훈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스토리 라인은?
제정 러시아 시대 사교계에서 주인공인 귀족 장교 페초린이 네구로바라는 여인을 이용해 유명해지려는 음모, 옛 애인인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에 대한 애증, 크라신스키라는 잘생긴 공무원과의 삼각관계에 대한 복선 등이 나온다.
19세기 초 러시아 사교계의 전형은 어떻게 묘사되나?
사교계 인물들과 그 속성을 하나의 전형으로서 보편화시켜 제시했다. 페초린이 네구로바를 유혹하는 것도 사교계 신참 인사가 대중의 관심을 끌고자 사용하는 보편적인 방식 중 하나로 해석된다. 네구로바의 삶 또한 사교계 아가씨가 노처녀로 늙어 가는 보편적인 과정으로 다뤄진다. 극장 관객 역시 페테르부르크 사회 전체의 축소판으로 묘사된다.
고골의 영향이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사실인가?
작품에서 페초린이 말단 공무원인 크라신스키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인물을 옷이나 신체 부위로 ‘물화’시켜 묘사하는 방법이나 소시민의 비참한 환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수법 등이 그것이다. 페초린이 크라신스키를 찾아가는 대목은 ‘생리학적인 스케치’ 수법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골적 요소가 눈에 띈다.
‘생리학적인 스케치’ 수법은 무엇인가?
인간을 격하시키고, 현실의 비참하고 추한 모습을 묘사하며 산문적인 풍경으로서 진흙탕과 안개, 비가 어우러진 서민 아파트 모습을 그려 낸 것이다. 몰락 귀족 출신 말단 공무원 크라신스키의 주변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서술자의 태도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서술 시점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서술자는 때로 제한적인 시점을 사용하다가도 완벽하게 전지적인 시점으로 돌아가서 서정적 일탈과 독자에게 말 걸기 등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서술자인 ‘나’는 페초린이 안락의자에 앉아 얼굴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무도회 후의 심경을 자신에게 고백한 노처녀가 없어서 네구로바의 마음을 잘 알 수는 없다고 말하는 식이다. 어쨌든 리얼리즘적 서술 기법을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로 시도한 소설이다.
리얼리즘 서술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어디인가?
페초린을 다루는 대목들이다. 서술자는 먼저 페초린의 외면 묘사를 통해 ‘냉혹한 장교’라는 이미지를 준다. 그리고 그의 방 내부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취향과 사상을 넌지시 알려 준다. 그 뒤부터는 연애사·과거사를 직접 밝혀서 그의 신변을 확실히 표현한다.
흔한 서술 방법 아닌가?
때는 19세기다. 러시아 문학에서 이런 방식을 제대로 쓴 작가는 30년 뒤에 나온 투르게네프다. 레르몬토프는 30년이나 앞선 실험을 한 것이다.
레르몬토프는 어떤 사람인가?
1814년 10월 3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외가는 명망 높은 가문이었으나 친가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였다. 장모-사위, 즉 레르몬토프의 외할머니-아버지 간에 가정불화가 있었다. 외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어려서 몸이 약해 세 번에 걸쳐 캅카스로 요양을 갔다. 어릴 적 캅카스에 대한 기억은 그의 감수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학은 언제 만났나?
1828년 모스크바 부속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이때 가장 유명한 서사시 ≪악마≫의 창작에 착수했다. 그는 이 작품에 전 생애를 바치게 된다.
모스크바대학을 자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1830년 모스크바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교수들은 학생들의 지적·정신적·정치적 호기심들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학생들의 반발이 심했다. 레르몬토프는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에 적극 동조하다가 결국 문제가 커져서 자퇴했다. 페테르부르크대학에 편입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2년 과정의 근위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사관학교 시절이 ‘끔찍했다’고 회고한다. 창조적인 열정은 들끓었지만, 고된 훈련이 글쓰기를 방해했다. 1834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페테르부르크 가까운 곳의 부대로 발령받았다. 수도의 사교계를 드나들며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사교계 입문과 여성 관계, 그리고 유명해진 과정은?
친가가 한미한 귀족 가문이어서 그런지 사교계 상층부는 ‘불손하게도 근본을 알 수 없는 자가 사교계에 들어오려 한다’고 여겼다. 사교계에서 관심을 얻고자 한 여인을 이용한 뒤 버렸다. 이런 행각은 나중에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에서 소재로 사용된다. 자신이 겪은 사교계 비화를 희곡 <가면무도회>에서 적나라하게 폭로했다가 공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1837년 푸시킨이 죽자 <시인의 죽음>을 썼는데, 이 시 속에 권력층에 대한 비판을 담아서 높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한동안 캅카스에서 유배살이를 했다. 유배가 풀린 뒤 그는 푸시킨의 뒤를 잇는 천재 시인으로 대환영을 받았다. 그 뒤 3년 동안 그의 문학은 정점을 달렸다.
황제의 분노를 유발한 사정은 무엇인가?
유배살이 뒤 몇 년 안 되어 그는 사교계 비화를 폭로하는 시 <얼마나 자주 현란한 군중들에 둘러싸였던가>를 썼다. 황제의 큰 분노를 샀고 결국 캅카스로 좌천성 발령을 받는다.
군대 생활은 어떠했나?
캅카스 최전방에서 체첸족과 전투를 벌였다. 대단히 훌륭한 장교로 뛰어난 통솔 능력과 전투 실력을 보여 줬다. 상관인 갈라페예프 장군은 그의 공훈을 높이 평가해 훈장 수여를 상신했으나, 황제는 거부했다. 크게 절망하면서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본격 문학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는다. 퇴역을 생각하면서 우선 휴가를 신청했다. 그러던 와중에 온천 휴양지인 퍄티고르스크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사관학교 동기인 마르티노프를 만나 사소한 시비가 붙었다.
결투가 인생의 끝이 된 사정이 궁금한데?
레르몬토프의 비판과 독설에 그를 싫어했던 인사들이 마르티노프에게 결투를 부추겼다고 한다. 상관과 헌병 역시 전후 사정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결국 1841년 7월 15일 결투를 벌이다가 즉사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당신은 누구인가?
홍대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레르몬토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푸시킨·레르몬토프·고골·도스토옙스키·불가코프 작품에 나오는 ‘악마성’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