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빌라도의 죽음
2371호 | 2014년 12월 23일 발행
죽기 전엔 모르는 것
강태경이 옮긴 ≪만인/빌라도의 죽음(Everyman / The Death of Pilate)≫
죄는 일곱, 복은 여덟
우리 삶에서
색욕, 식욕, 탐욕, 나태, 분노, 시기, 오만은
청빈, 온유, 애통, 의로움, 긍휼, 순결, 평화, 인내와
함께한다.
사람은 죄와 복을 나누지 못한다.
죽음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 나는 인간에게 한없는 긍휼을 베풀고자 했지만
내 긍휼을 진정으로 구하는 자가 어디에도 없구나.
저들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취해 있으니
내 저들에게 정의를 행해야 하리라.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만인에게 그리할 것이라.
대적할 자 없는 나의 전령 죽음아, 어디 있느냐?
(‘죽음’ 등장)
죽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부르심을 받아 여기 왔사오니
명하심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 만인에게 가라.
가서 내 이름으로 저가 걸어야 할 마지막 순례의 길,
무엇으로도 피하지 못할 그 길을 보여라.
오는 길에 저는 제 인생의 결산서를 지참해야 하리니
한순간의 지체함도 없이 출발하게 하여라.”
<만인>, ≪만인/빌라도의 죽음≫, 작자 미상, 강태경 옮김, 32쪽
‘만인’은 말 그대로 만인(萬人)인가?
또는 범인(凡人)이다. 영국의 하급 귀족 내지 부유한 평민 계급 인물이다. 세상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를 추구하고 세속적 환락을 향유한다.
죽을 때가 된 것인가?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로 하나님이 급파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만인’에게 인생의 회계장부를 준비해 곧장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
‘만인’은 천 파운드를 줄 테니 딱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죽음은 물러서지 않는다. 대신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지상의 친구와 동행하는 것은 허락한다.
죽음에 동행할 친구가 있겠는가?
만인은 ‘우정’, ‘친척’과 ‘사촌’, ‘재물’을 찾아간다. 이들은 만인을 한껏 동정하지만 동행은 거절한다. 마지막으로 ‘선행’을 찾아간다.
‘선행’은 선행을 베푸나?
‘선행’은 두 다리를 잃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찬 바닥에 누워 있다. 만인이 저지른 죄악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만인과 함께하겠다고 맹세한다. ‘지식’도 안내자가 되어 ‘만인’을 따른다.
‘지식’은 어디로 안내하나?
구원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곳에는 ‘참회’가 있다. ‘만인’은 ‘참회’가 건넨 채찍으로 자신을 채찍질한다. 고행이다.
고행의 결과는?
‘선행’이 질병과 근심에서 벗어나 걸을 수 있게 된다. 그는 ‘만인’이 최후 심판대 앞에 설 때 증인으로서 ‘만인’ 곁을 지킬 것이다.
순례의 끝은 어디인가?
‘만인’과 ‘선행’은 무덤 앞에 다다른다. 나중에 합류한 ‘분별’과 ‘힘’, ‘아름다움’과 ‘오감’도 함께다. 하지만 무덤 안까지 함께하는 자는 ‘선행’뿐이다. ‘만인’이 ‘선행’과 더불어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최후의 장관이 펼쳐진다.
최후의 장관이란?
한 무리의 천사가 등장한다. “환희로 가득 찬 선율”로 “만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서는 것을 맞이”한다.
종교극인가?
영국에서 발전한 도덕극의 대표작이다. 제재를 성경이 아니라 민담이나 속요에서 발견되는 우화적 요소에서 차용했다는 점이 종교극과 다르다. 추상적 개념이나 가치를 의인화해 무대에서 재현하는 방식은 도덕극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뚜렷한 경향이다.
의인화되는 개념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예를 들면 가톨릭교회에서 규정한 일곱 대죄, 즉 색욕, 식욕, 탐욕, 나태, 분노, 시기, 오만 이다. 이들은 순차적으로 또는 한꺼번에 나타나 주인공을 유혹한다.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해서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팔복도 등장인물이 된다. 청빈, 온유, 애통, 의로움, 긍휼, 순결, 평화, 인내 등이다. 이들은 때로 미덕과 악덕 또는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나뉘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작품이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는가?
15세기 말엽에 쓰인 이 작품은 르네상스 극에도 영향을 미쳤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포스터스 박사>에는 일곱 대죄와 선악의 천사들이 그대로 등장한다. 리처드 3세나 이아고 같은 셰익스피어의 악당들은 ‘악덕’의 진화라 할 수 있다.
<빌라도의 죽음>은 어떤 작품인가?
성경극에 속하지만 그 전형에서 벗어난 독특한 소극이다. 민속적인 상상력과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14세기 초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빌라도는 어떻게 죽는가?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나병을 앓고 있다. 예수의 치유 능력에 대해 소문을 듣고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전령을 보낸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미 예수를 처형했다. 대신 베로니카가 나서 황제 병을 치유한다. 그녀는 황제를 낫게 한 대가로 빌라도에 대한 복수를 요구한다. 빌라도는 감옥에서 자결한다.
죽는 것으로 끝인가?
쉽게 잠들지 않는 빌라도 시신 때문에 갖가지 소동이 벌어진다. 이 장면들은 성경극의 틀에서 벗어나 민중 축제의 일환으로 공연된 이 극의 오락적, 여흥적 성격을 보여 준다. 특히 악마들이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고 춤판을 벌이는 대목에서 여흥은 최고조에 달한다.
빌라도의 죽음이 그리 즐거운 일인가?
민중의 원죄의식과 관련 있다. 당시 민중은 교회 영향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공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축제를 통해 그 죄의식의 카타르시스를 추구했던 게 아닐까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강태경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