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드라마: 장르, 스타일, 감수성
변재란이 옮기고 존 머서(John Mercer), 마틴 싱글러(Martin Shingler)가 쓴 <<멜로드라마: 장르, 스타일, 감수성(Melodrama: Genre, Style, Sensibility)>>
사랑, 운명에게 물어봐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녀는 안간힘을 쓴다. 이 이상한 관계는 좁은 계단에서 스치는 옷자락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면서 느끼는 강렬한 파토스, 관객은 흔들린다.
피서지에서 <<멜로드라마>>, 억지 아닌가?
사람을 피하고 싶어도 절대 피할 수 없는 곳이다. 온갖 인간 군상의 출몰, 유사 이래 나타난 모든 멜로드라마의 등장인물과 뭐가 다를까?
멜로드라마가 선택된 그들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얘기라는 뜻인가?
그렇다. 우리 중 누군가의 이야기다. 이번 피서에도 어김없이 함께 가야 하는 우리가 등장한다. 일상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을 뿐 절대 피할 수 없다. 우연과 필연의 시소게임에 매달린 자신의 운명을 피서지 멜로드라마에서 발견할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어떻게 정의되나?
‘melos’ 더하기 ‘drama’가 어원이다. 음악만큼 정서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멜로드라마에 가족의 갈등과 긴장, 총체적 난국이라는 상황을 대입해 보자. 부모 자식 간, 세대 간, 가상 가족, 연인 사이에 벌어질 수도 있다. 가족 경험을 가진 관객의 심리 자극이 목적이다.
이 장르는 무엇으로 관객을 포박하나?
영화 안에서 관객은 꼼짝없이 포획된다. 하지만 동일시 과정 속에서 상상적 해결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정서의 파장을 본다.
동일시 과정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정서가 그렇게 강력한가?
인생은 때로 그저 폭우에 젖은 채 멜로드라마라는 자동차가 일으키는 흙먼지를 속수무책 통과해야 한다. 등장인물이 어떤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면서 느끼는 강렬한 파토스, 그것이 멜로드라마 생명이다.
감수성을 헤집는 멜로드라마의 전략은 무엇인가?
아쉬움, 안타까움, 엇갈림이다.
이 책 <<멜로드라마>>는 무엇을 분석하나?
작가주의, 장르, 이데올로기, 미장센,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영화의 수용과 반응까지 멜로드라마 전체 상을 제공한다. 장르와 스타일,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는 감수성에 주목한다.
이 책이 당신을 흔든 요인은 무엇인가?
사랑과 경멸을 동시에 받아온 멜로드라마 역사가 보인다. 장르와 작가주의 영화 재현, 미학, 이데올로기 역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쟁 속에 독자를 끌고 간다. 가족, 여성, 모성, 감수성, 스타일을 중심으로 특정 감독, 시대, 지역의 작품을 따라간다. 특정 드라마나 웹툰, 영화에 내 몸과 마음이 왜 그렇게 열렬히 반응했는지 알게 된다.
피서지에서 이 책을 즐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잘 만드는 감독, 대표 작품을 메모해 둔다. 유튜브로 찾아보고, 디브이디로 제대로 보고, 자신의 안목과 기억을 믿으며 다시 책을 본다. 자신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의 발견,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다.
멜로드라마를 즐기려는 관객이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감수성을 믿어라. 그런 감수성을 찾을 수 있는 영화를 발견하는 데 적극적이면 된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이미 훌륭한 관객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느낄 수 있는 멜로 작품은?
<화양연화>다. 제목 그대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 의심하지만 자신도 그 전철을 따르는 게 옳은지 확신하지 못하는 남자와 여자 이야기다. 조용히 식사하고 수줍게 토론하며 서로에게 운명적인 사람일지 모른다 생각한다.
<화양연화>가 우리를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성처럼 가까이 맴돌면서도 자신의 궤도를 공유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이상한 관계에 부여된 왈츠의 우아함과 리듬, 좁은 계단에서 스치며 지나가기, 어두운 거리에서 날씨로 투덜대기, 배우자 대역이 되어 미리 연습해 보는 언쟁, 세밀하게 복원된 1960년대 홍콩 뒷골목. 한없이 억제된 안타까운 감정은 강력한 파동으로 전염된다.
<화양연화(花樣年華)>(2000, 왕가위 감독)
멋진 사랑 말고 비겁한 사랑도 감동이 될 수 있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그렇다. 시간은 상실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상실이 눈물을 야기한다. 다리가 불편해 할머니의 도움으로 유모차로 산책하는 소녀 조제와 그 삶에 끼어든 츠네오 이야기다. 시작의 설렘, 빛나는 시간, 시들어 가는 감정, 아픈 이별까지 사랑의 과정을 그린다.
어떤 장면에 당신이 무너졌나?
츠네오가 조제와 헤어진 후 여자 친구와 거리를 걷다 울컥 무릎을 꿇는다. 누구든 사랑 앞에 비겁했던 순간을 떠올린다면 그 파토스는 천둥소리처럼 지축을 울릴 것이다. 호랑이는 조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보겠다던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던 동물이다. 물고기들은 조제가 만든 환상 속에서 자신을 투영해 낸 존재다. 조제에게 다가온 사랑과 처한 현실의 무게에 멜로드라마의 하중을 더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ジョゼと虎と魚たち)>(2003, 이누도 잇신 감독)
멜로드라마의 고전을 꼽는다면 뭘 추천하겠나?
더글러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이다. 불완전한 해피엔딩이 있다. 어색하고 행복한 결말의 징후적 해석도 가능케 한다. 멜로드라마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무엇을 보나?
1950년대 미국 중산층 가족이다. 과부, 어머니, 아내에게 가해지는 억압적 이데올로기와 압박 속에 캐리가 있다. 그녀는 당시 수많은 멜로드라마를 생산하던 텔레비전 소비자라는 여성 위치로 치환된다. 결혼과 성별 제도 안에서 억압되고 고립된 여성의 곤경을 감독 특유의 섬세한 미장센으로 재현한다. 크리스마스날 자식들의 방문 장면은 캐리의 위치를 가장 통렬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All That Heaven Allows)>(1955, 더글라스 서크 감독)
전문가인 당신은 영화를 어떻게 보나?
일단 찌질한 자신에서 도피해야 한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뗀다. 가기 쉽고 의자가 편한 시원한 극장을 선택한다. 가장 편한 복장으로 약속도 만들지 않는다. 영화는 평소 안목으로 미리 찜한다. 그렇게 선택한 영화 한 편.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변재란이다. 순천향대학교 영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