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게임
김보경이 옮긴 빅토르 아임(Victor Haïm)의 ≪무대 게임(Jeux de scène)≫
웃다 보면 안다.
익살과 통렬이 빛나는 매력의 대사, 연극으로 연극을 비웃고 우리 각자를 비웃고 우리의 밑구멍을 들여다보게 한다. 연출가와 배우 그리고 조명 디자이너가 웃음을 만든다. 웃다 보면 안다. 우리가 누군지.
제르트뤼드(바티스트에게) 아무리 드라마틱한 작가라도, 자기 작품이 공연되기 전에 절망에 빠져들 이유가 전혀 없어. 공연 전에 작가가 겪는 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거든.
결론적으로, 요점을 정리해 보면,
하나, 죽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얘를 죽이고 싶은 욕구!
둘, 혹은 고문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죽을 때까지.
셋, 불을 지르고 싶은 욕구가 있다. 다시 말해서 내 예술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재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다.
넷, 예술 활동은 필연적으로 나르시스적인 형태를 낳는다. 따라서 내가 내 예술 도구를 파괴하는 건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다섯, 결론적으로, 난 구렁텅이에 빠졌다.
여섯, 결론에 추가해야 할 사항,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르탕스(바티스트에게) 얜 지금 생각하는 중일까?
기분이 나쁜가?
“나 기분 나빠” 하고 나한테 말할까?
그 전화 인터뷰 때문이구나!
기자하고 통화할 때 그 풋내기 계집애가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어….
그냥 느낌이….
일이 잘될 때 나오는 웃음소리하고 그 어린 계집애가 희열을 느낄 때 내는 신음 소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어!
아무튼 나의 사랑스러운 게르르르르르트루루루루드가 몹시 흥분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힘들어지겠는걸….
제르트뤼드 생각하면 할수록, 자기야, 내 생각에는−우상파괴적인 이 용어를 쓰자면−내 방법론이 좋은 것 같아. 먼저 우린 즉흥 연기를 할 거야.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을래. 3주가 걸리면 3주 동안 할 거고,
4분이 걸리면 4분 동안 할 거야.
내가 바라는 건 네가 맡은 인물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거야.
등장인물은 없어.
네가 있는 거지.
방금 정말 판타스틱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어.
이건 신적인 결정이야. 내 말 잘 들어, 내가 말한 신이라는 개념은 신비주의적인 함의를 모두 제거한 거야.
내 결정은 신적인 결정이야, 그건 오직 작가가 신이기 때문이지, 알겠어?
≪무대 게임≫, 빅토르 아임 지음, 김보경 옮김, 68∼70쪽
두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여성 작가이자 연출가 제르트뤼드와 멋지게 컴백하려는 여배우 오르탕스가 빈 무대에서 공연 연습 중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보이며 칭찬과 감탄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오르탕스가 개인사, 복잡한 남자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는 통에 연습은 진척이 없다. 다정했던 대화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서서히 맹수처럼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는다.
서로의 인정이 필요한 두 사람이 맹수처럼 물어뜯게 되는 이유는?
둘은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오르탕스는 단순하고 변덕이 심하며 거침없이 말한다. 특히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반면 제르트뤼드는 지성적이며 정치적 견해가 분명한 잘난 체하는 인텔리다.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것은 연극이 유일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공연 연습 과정에서 겪는 갈등은 작품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가 아니라 서로의 재능을 믿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연출가는 배우의 재능에, 배우는 작가의 재능에 의문을 갖고 상대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작가는 무대 위에서 무대 뒤를 보여 주려는 것인가?
아임은 이 작품에서 두 인물의 입을 통해 배우의 나약함, 작가나 연출가가 갖는 두려움 외에도 표현의 자유, 검열, 기자나 평론가들의 권력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뤄 가며 우리를 무대 뒤로 초대한다. 특히 작가와 연출가, 배우가 각자 가면을 벗을 때 무대 뒤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 실체를 특유의 유머와 예리함으로 보여 준다.
독재 체제를 강력 비난하는 제르트뤼드가 독재자라는 오르탕스의 비난은 정당한가?
오르탕스 말에 따르면 제르트뤼드는 독재 체제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도 연출가로 무대에만 서면 끔찍한 독재자가 되어 폭군처럼 행동한다. 배우에게는 작품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못하게 하면서 자기 결정은 신적인 결정이라고 말한다. 연출가의 이런 강압적인 태도에서 독재자를 연상할 수 있다.
그녀의 이름에 ‘전쟁’이라는 뜻이 숨어 있나?
초반에 제르트뤼드는 오르탕스에게 자기 이름을 북유럽식으로 ‘게르트루드’라고 발음해 달라 한다. 북유럽식으로 발음했을 때 ‘게르(Guerre)’는 프랑스어로 ‘전쟁’을 뜻한다. 이런 요소 역시 그녀를 독재자처럼 보이게 한다.
조명 디자이너 바티스트의 역할은?
무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조명을 밝히거나 어둡게 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제르트뤼드와 오르탕스는 상대에게 말 못할 속내를 바티스트에게 방백 형식으로 털어놓는다. 그는 마치 신처럼 말없이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 둘의 싸움을 목격하는 유일한 증인이다. 이처럼 <무대 게임>은 배우들의 연기를 더욱 빛나게 해 주는 조명 디자이너를 보이지 않게 무대로 불러낸다. 관객에게 보이지 않지만 무대 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작가가 경의를 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경험담인가?
연극 관련 학술회나 토론회 등에서 들었던 재미난 이야기, 공연 프로그램 책자에서 읽은 것, 그 밖에도 40여 년간 작가로, 연출로, 배우로 연극계에 몸담으면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썼다. 처음부터 자신이 알고 지내던 두 여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지만, 이들 출연은 성사되지 않았다.
연극인들을 풍자한 작품인가, 어떤 연극인인가?
극작가, 연출가, 배우는 물론 연극 평론가까지, 모든 연극인들을 신랄하고 익살맞게 풍자한 희극이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무대 게임>은 연극에 대해 유식한 체하는 이들에 대한 복수라고 말했다. 아르토의 연극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글자 그대로 적용하려 애쓰는 제르트뤼드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제르트뤼드의 천박성은 어디서부터 드러나는가?
아르토는 “쓰인 시는 한 번만 가치가 있으니 다음엔 그것을 파괴하라”고 했고, 제르트뤼드는 이를 실천하듯 “텍스트를 파괴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며 오르탕스에게 텍스트 없이 연기할 것을 주문한다. “난 건전하면서 명쾌한 작품에 출연할 거야, 정신병에 걸린 레즈비언들하고 흥청망청 섹스 파티를 하고 나서도 장님이 되지 않고 전신이 마비되지 않는 역할로!” 유식한 체하는 제르트뤼드에 대한 오르탕스의 반격이다.
아임이 작품에서 웃음은 어떤 의미인가?
그의 작품에는 신랄한 풍자 코미디 극이 많다. 그만큼 ‘웃음’은 중요한 요소다. “나는 그저 웃기 위해서 작품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내 모든 작품에서 사람들이 웃고 즐기길 바란다. 내 작품이 유쾌하길 바라지만 이게 목표는 아니다. 그건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아임의 고백이다.
2003년 몰리에르 최우수 극작가상을 받은 것이 이 작품인가?
2002년 9월부터 4개월간 공연한 뒤 2003년에 재공연했다.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익살과 통렬함이 넘치는 매력적인 대사를 빚어냈고, 몰리에르나 마리보가 했던 것처럼, 대사를 통해 경쾌하게 연극을 비웃고, 우리 각자를 비웃고, 우리의 결점을 비웃는다. 최고의 두 여배우는 단어 하나하나에 열정을 불사르며 텍스트를 잘 살려 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후 프랑스의 크고 작은 극단들이 꾸준히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2010년에는 아임이 직접 연출을 맡아 파리에서 공연했다.
관전 포인트는 자존심 배틀인가?
연극에 대한 생각은 다르지만 서로의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해야 하는 두 사람이 어떻게 체면을 구기지 않으면서 갈등을 해결할 것인가가 관전 포인트다. 팽팽하게 맞서는 두 사람 사이에서 힘의 균형이 어떤 식으로 역전되는지도 주목해야 한다.
빅토르 아임은 어떤 작가인가?
극작가, 영화와 텔레비전 시나리오 작가, 배우,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다. 작품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현재까지 5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대부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유머로 세태를 꼬집는 현실 참여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르트르, 브레히트, 골도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현재까지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왜 자신을 ‘인간적인 인간 혐오자’라 부르나?
작품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등장시켜 인간의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모습을 그린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권력의 모순과 폐해, 부조리를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문체로 비틀어 풍자하고 꼬집는다. 모든 작품이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굴욕’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대부분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본질은 비극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쓰기만 하나, 연기나 연출은 하지 않나?
자신이 쓴 작품을 직접 연출하며, 배우로도 활동 중이다. 1983년부터 1994년까지 교육자로서 여러 연극 학교와 대학에서 공연 예술, 연기를 지도하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극예술작가·작곡가협회(SACD)’ 이사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극예술인들의 권리 보호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한편 프랑스연극센터 사무국장직을 맡아 연극 진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에서는 처음 소개되나?
아임의 작품 중 40여 편이 16개 언어로 번역되어 독일, 미국, 브라질, 터키, 아르헨티나, 폴란드, 일본 등 20여 개 나라에서 공연되었다. 한국에서는 <무대 게임>으로 그의 작품이 처음 소개된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보경이다. 프랑스 리옹2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강사다. 현대 프랑스어권 희곡을 번역하고 공연하는 극단 프랑코포니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