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희
최형섭이 옮긴 이어(李漁)의 <<무성희(無聲戱)>>
17세기 중국의 소리 없는 연극
이어는 소설을 소리 없는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당대 중국 최고 대중 작가의 탄생이 여기서 비롯된다. 양식과 인물의 스트레오타입을 박살 내면서 통속의 미학을 완성시켜 놓았다.
“어머니 말씀은 옳지 않아요. 저는 남편이 있는 몸으로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거라 했는데 어찌 재가할 수가 있겠어요?”
강선이 이 말을 듣고서 무슨 말인지를 몰라 얼굴색이 변하며 물었다.
“네가 남편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네 부모가 허락한 적이 없는데 혹시 네가 혼자 주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결혼을 허락한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저 혼자서 다른 사람에게 결혼을 허락할 수 있겠어요? 그 남편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어려서 저와 짝지어 준 사람인데 귀머거리인 양 벙어리인 양 모른 척하시나요?”
“얘가 이상한 얘길 하네. 그렇다면 지금 네가 말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바로 생 역을 하는 담초옥이에요. 그 사람이 극단에 들어오기 전 온종일 이리저리 공연을 따라다녔던 것은 모두 저 때문이었어요. 극단에 들어와서 연극을 배운 것도 그걸 핑계로 여기에 들어와 저와 가까워지려는 의도였어요. 나중에 그가 다시 정 역을 하려고 하지 않고 생 역으로 바꿔 저와 짝이 되려 했던 것도, 드러내 놓고 혼인 얘기를 할 수 없으니 수수께끼를 내주고 그걸 맞혀보게 하려는 생각이었고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생과 단을 하셨으니 애정극을 공연했던 사람으로 설마 이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시지는 않겠죠? 저를 그 사람에게 시집보낼 생각이 없으셨다면 애당초 그를 머물게 하여 연극을 배우도록 하지 말았어야죠. 설사 그를 머물게 하여 연극을 배우게 했더라도 그를 생 역으로 바꿔주시지 말았어야죠. 그 두 가지를 모두 허락하셨으니 이는 그가 낸 수수께끼를 알아맞히고 그에게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뜻이 분명하잖아요. 연극을 한 이후로 그가 제 남편이고 제가 그의 부인이 아니었던 적이 하루라도 있나요? 연극을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증인이에요. 사람들은 모두 우리 두 사람이 조물주가 짝지어 준 천생배필이라고 말했어요. 지금까지 부부로 몇 년 동안 살았는데 이제 갑자기 저보고 그를 배신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어머니께서도 평상시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해 오셨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제가 비록 불효자식이기는 하지만 순결한 몸으로 어떻게 스스로 더럽힐 수 있겠어요? 그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저는 결코 할 수 없어요!”
≪무성희≫, 이어 지음, 최형섭 옮김, 42~43쪽
앞의 이야기는 <무대에서 꽃피운 두 연극배우의 사랑> 가운데 어떤 장면인가?
담초옥과 유막고는 연극 공연 무대에서 남녀 주인공 역을 하면서 사랑을 키웠다. 현실에서 허락되지 않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간절했다. 딸과 어머니, 유막고와 유강선은 사랑과 가치관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둘의 갈등이 드디어 폭발한다.
≪무성희≫가 무슨 뜻인가, 단편집인가?
≪무성희≫는 ‘소리 없는 연극’이라는 뜻이다. 17세기 중반 대중 인기 작가였던 이어가 창작하고 간행한 단편 백화소설 작품집이다. 그는 소설을 ‘소리 없는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도 없는 소설이 금서로 지정된 사연이 무엇인가?
청조에 불순한 내용이라는 이유였다. 어사 소진은 간행을 도왔던 절강성 포정사 장진언을 탄핵했다. 관직이 박탈되어 유배되었고 ≪무성희≫는 금서로 지정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이 작품의 반향과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말한다. 금서 지정 작품은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일부 유실된다.
전하는 것은 몇 편인가?
제1집에 수록되었던 12편 전체와 제2집에 수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6편을 포함해 모두 18편이다. 이후 검열을 피하기 위해 ≪연성벽(連城璧)≫이라는 명칭으로 개명되어 출판되었다. 거기에는 제1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6편이 포함되었는데 그 작품들이 제2집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추정된다.
작가 이어는 어떤 시대를 산 어떤 인물이었나?
‘삼언’을 지었던 풍몽룡이나 ‘양박’으로 유명한 능몽초보다 한 세대 뒤인 17세기에 활동했다. 16세기 전후 본격화된 소설과 희곡의 출판 열기는 17세기에 들어 고조된다. 역사연의(歷史演義), 신마소설(神魔小說), 인정소설(人情小說), 재자가인소설(才子佳人小說), 공안소설(公案小說)이 출현했다. ‘사대기서(四大奇書)’의 가장 인기 있는 판본도 이 시기에 나왔다. 이어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출판업자였다.
작가이면서 출판업자라면 문학을 보는 눈도 특별했다는 뜻인가?
그의 소설은 진지하고 비판적인 작가 의식을 담은 고뇌의 산물은 아니다. 아속(雅俗)의 접점에서 이야기의 재미와 적절한 교훈을 추구했던 통속 읽을거리다.
통속 읽을거리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가?
다른 이유가 있다. 소설 양식과 인물 설정, 가치와 사유 방식이 기존 소설의 스테레오타입을 깨뜨릴 정도로 새로웠다. 끊임없이 새로움과 변화를 추구한 작가다.
<무대에서 꽃피운 두 연극배우의 사랑>에서 나타나는 이어의 신선감은 어떤 것인가?
재자가인소설의 상투 패턴에 변화를 주었다. 독자는 신선감을 느낄 수 있다. 기존 재자가인소설의 여주인공이 대체로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유막고는 배우다. 천한 신분의 여성이다. 이 점이 새롭다. 생(生)과 단(旦) 역을 하는 두 남녀 배우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무대에서 나누다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이 맺어진다. 인물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가 기존 소설과 확연히 다르다.
사회 통념을 깨뜨리는 이어의 새로운 시각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
자신의 판단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청렴한 관리가 탐관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관점, 운명은 타고난 것이지만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생각, 의리를 지키고 선행을 실천하는 거지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관리를 비판하려는 태도는 분명히 새로운 시각이다.
그의 새로움에 대한 추구, 변화의 모색은 출판업자라는 상업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소설에 식상했던 독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상업 목적과 의도가 작용했다. 그러나 문인으로서 작가의 자의식이 받쳐 주지 않았다면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어의 작품 세계에서 소설과 희곡은 어떤 관계에 있나?
일본 손케이카쿠 문고 소장 ≪무성희≫의 제1회 <아름다운 여자를 두려워하던 못생긴 남자가 공교롭게도 미인을 얻다>, 제2회 <미남자가 의혹을 피하려다 도리어 의심을 받다>, 제12회 <처첩들은 비파를 끌어안고 시녀는 절개를 지키다>에는 “이 작품은 곧 나오게 될 희곡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이어서 나올 희곡 작품이 있다”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그가 희곡으로 개편할 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썼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번에 옮긴 중국 단편 백화소설의 출간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소개된 백화소설은 대개 풍몽룡의 ‘삼언’ 소설에 치중되었다. 이어는 언어의 선택, 소재의 활용, 주제의 설정에서 풍몽룡과는 다른 독특한 소설 세계를 구축한다. 그의 소설은 16~18세기 중국 소설의 황금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형섭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중어중문학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