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레터 [주간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제인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은 물질이 지닌 행위성을 올곧게 파악하려 하는 철학적 · 정치적 기획입니다. 생기적 유물론에 따르면 물질은 고유하게 생동합니다.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고, 방향성을 바꾸거나 교란하며,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가 되면서 예기치 못한 효과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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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이 가려진 진면목을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여기 베넷이 주목한, 혹은 주목할 만한 기묘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컴북스이론총서 ≪제인 베넷≫의 안내를 따라 생동하는 물질과 인사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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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화는 다윈으로 하여금 지렁이의 활동에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게 했고, 이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다윈은 지렁이에 고유한 물질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르시시즘에 기묘한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 과학자의 자기중심적 응시가 역설적으로 지렁이라는 타자의 ‘정수(精髓, jizz)’를 포착하게 만들었다.
≪제인 베넷≫, “06 의인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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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화의 재발견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40년이 넘는 긴 세월에 걸쳐 지렁이를 연구했습니다. 다윈은 지렁이가 흙을 옮긴다는 사실을 객관적 · 정량적으로 실증하려 했고, 이를 위해 지렁이가 지표에 내보내는 똥 무더기의 양 등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습니다.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지렁이의 역할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베넷은 다윈의 지렁이 관찰기를 통해 의인화의 문제를 다룹니다. 의인화는 보통 비인간에게서 인간의 특성을 읽어 내려는 인간중심주의의 강력한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다윈 역시 관찰 초기에 지렁이에게 인간의 지성과 의도를 투사하며 나르시시즘적 의인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베넷은 의인화가 때때로 비인간의 행위성과 물질의 생명에 주목하게 하는 실용적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인화는 다윈으로 하여금 지렁이의 활동에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게 했고, 이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다윈은 흙을 먹고 소화해 분변토를 쌓아 올리는 지렁이의 고유한 행위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작고 느린 변화를 끈질기게 추적해 지렁이의 정수를 포착한 과학자의 시선에서 비인간을 더 깊게 이해할 단서를 찾아보길 바랍니다.
찰스 다윈 지음, 최훈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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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 넘치는 물질성이 버글거리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어떤 ‘나’ 또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것으로 전환되는 인간 · 비인간과의 얽힘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위 해야 하는가? 베넷은 생기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휘트먼의 작품들 중 일부를 선별해 독창적으로 독해하고 변형하며 주석을 단다.
≪제인 베넷≫, “08 정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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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힌 우주를 노래하다 ≪나 자신의 노래≫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은 인간, 동물, 식물 하나하나가 우주와도 같다고 노래합니다. 자연 만상의 어떤 미물이라도 기적같이 신비롭다고 여기면서 모든 것을 예찬합니다. 휘트먼은 모두가 본질적으로 신성하고 존귀하다는 생각을 품고 자연을 대하면 한 포기의 풀에서도 우주의 신비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총 52편의 장시가 실린 휘트먼의 최고 걸작으로, 자아와 타자 그리고 본질과 현상의 관계에 대한 휘트먼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베넷은 최근작 ≪유입과 유출: 월트 휘트먼과 함께 쓰기≫(2020)에서 휘트먼의 작품을 새롭게 독해합니다. ‘유입(influx)’과 ‘유출(efflux)’이라는 단어 역시 <나 자신의 노래>의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베넷은 휘트먼의 시를 매개로 인간 행위성과 자아의 문제를 탐구하며, 생동하는 물질성의 세계에서 인간이 비인간과 더 나은 관계를 맺을 방법을 모색합니다. 풀, 벌레, 짐승, 인간 등 모두가 얽힌 휘트먼의 우주에서 베넷이 상상하는 새로운 세계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월트 휘트먼 지음, 윤명옥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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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후와 바이러스, 미세플라스틱, 방사성 핵종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예상과 의도를 벗어날 가능성’을 우려한다. 즉, 우리는 물질의 행위성, 물질의 활력, 생기적 물질성을 두려워하고 우려한다.
≪제인 베넷≫, “물질의 삶”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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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Marie Curie)는 ‘방사능’이라는 말을 최초로 정의하고 방사성 물질을 연구하는 길을 연 과학자입니다. 이 책은 퀴리가 1903년 발표한 박사 학위 논문으로, 방사능이 특정 물질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원자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임을 밝혀냈습니다. 수차례의 실험을 시도하며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퀴리의 여정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퀴리 이후 여러 과학자들의 노고로 인간은 방사능을 이용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방사능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처럼 우리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렇듯 물질의 생명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과 의도를 다소간 벗어나며, 생성하고 창조할 뿐 아니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과정으로도 드러납니다. 물질과의 지속 가능한 관계를 모색하는 베넷의 주장에 귀 기울이면서, 방사성 물질의 생동과 처음 만난 퀴리의 목격담을 되돌아봐야 하는 까닭입니다.
마리 퀴리 지음, 박민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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