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티
2552호 | 2015년 4월 22일 발행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
류은희가 옮긴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의 ≪미네티(Minetti)≫
내 조국에서 내 작품을 출판 공연할 수 없음.
나치 독일과의 합병, 과거 청산의 부재, 극우 편향과 보수성, 그러고도 뻔뻔하게 살아 있는 나라.
작가는 자신의 조국을 비난한다.
오스트리아는 검열과 금지로 대답한다.
죽기 이틀 전 베른하르트는 유언한다.
미네티: 미네티입니다
고전문학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다시 천장을 올려다본다)
변화는 싫어
변화가 싫어
(여자에게)
일정 시점부터는
변화를 혐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두 손으로 외투에 묻은 눈을 털어 낸다)
오스탕드에 눈보라
진짜 엄청나군
(여자에게)
여기서
플렌스부르크의
극단 단장과
약속이 있어요
난 연극배우입니다
≪미네티≫,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 옮김, 10∼11쪽
지금 여기서 누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미네티, 그는 스스로를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라 부른다. 약속 시간에 30분 늦었고 상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배우가 리어만 연기하나?
열여덟에 처음 리어를 연기한 뒤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젊은 시절엔 독일 전역을 순회공연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고 나서 30년 동안, 외딴 시골에서 감금과 다름없이 고립되어 살아야 했다.
왜 고립되었나?
고향인 뤼베크 시에서 리어를 공연했다. 관객은 시의원들이었다. 그들은 미네티를 고소했다. “고전문학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신문은 “극장을 파괴”하고, “극장 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으며 “관객을 기만”했다고 썼다.
고전문학을 거부했는가?
그들이 말하는 ‘고전’이란 관객을 편하게 하고 가치와 규범을 방해하지 않는 예술을 말한다. 미네티는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지는가?
전 재산을 들여 다투었지만 결국 패소했다. 이후 누이가 있는 외딴 시골에서 30년간 은둔했다.
30년 동안 뭘 했나?
다락방에서 매일 리어의 대사를 낭독했다. 매달 13일에는 거울 앞에서 리어의 대사 전체를 한 번은 영어로, 한 번은 독일어로 공연했다. 마지막으로 리어를 꼭 한 번 다시 공연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다.
희망으로 끝나는 희망인가?
실현의 실마리가 보인다. 플렌스부르크 극장이 2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리어를 공연하기로 한다. 12월 31일 눈보라 치는 밤,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오스탕드행 기차를 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해 미네티는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극단 단장이 보냈다는 전보도 잃어버리고 없다. 어쩌면 이 약속은 30년 동안 불안과 강박에 쫓기면서 비롯된 그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다. 그도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향과 무대에서 내쫓겨 완전히 늙고 쇠약해진 미네티는 오스탕드 해변, 눈보라 속에서 리어 가면을 쓰고 꼿꼿이 앉아 홀로 죽음을 맞는다.
리어 가면이라니?
화가 제임스 앙소르가 오스탕드의 호텔에서 그를 만났을 때 만들어 준 가면이다. 귀중한 재산으로 여겨 어딜 가든 트렁크에 넣어 다녔다. 미네티가 ‘고전’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앙소르, 미네티 모두 실존 인물 아닌가?
그렇다. 이 작품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당시 고희가 된 배우 베른하르트 미네티를 위해 쓴 헌정 작품이다. 실제 공연에서 미네티가 ‘미네티’를 연기했다. 제임스 앙소르는 벨기에 오스탕드 출신으로 ‘가면과 해골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누구인가?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문제 작가이자 세계 무대에서 브레히트와 더불어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다. 모국인 오스트리아 국가와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무엇을 비판했는가?
나치 독일과의 합병, 과거 청산의 부재, 극우 편향과 보수성을 겨냥했다. 결국 공연에 대한 검열, 출판 금지와 같은 법적 제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도인 빈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여론몰이에 시달려야 했다.
베른하르트의 응전은?
사후 문학적 망명이다. 1989년 지병인 폐 질환으로 죽기 이틀 전에 직접 공증을 마친 유언장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출판, 공연되는 것을 일절 금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류은희다. 베른하르트 문학을 전공하고 연구하는 번역자다.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