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원조 – ≪식도락≫
북레터 [주간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안녕하세요. 북레터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일본 미디어에는 요리를 다룬 작품들이 참 많습니다. ≪맛의 달인≫, ≪고독한 미식가≫, ≪심야식당≫… 업계에서는 “요리”와 “미식”이 들어가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그런데 100년 전만 해도 일본의 식문화는 매우 보잘것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1000년 이상 유지되었던 육식 금지령이 풀린 것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였으며, 그때까지 일본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고 식문화도 매우 빈약했습니다. 그렇다면 소위 “구루메 문화”로 일컬어지는 이 일본의 미식 문화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그 시작은 바로 1903년 ≪호치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무라이 겐사이의 소설 ≪식도락≫입니다. 일본의 식탁에 세계화의 문을 열다!
≪식도락≫은 무라이 겐사이(村井弦斎, 1864∼1927)가 지금으로부터 약 110여 년 전인 1903년 ≪호치신문(報知新聞)≫에 연재했던 신문 소설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총 네 편으로 구성된 장편 소설이죠.
이 소설이 연재되던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개화라는 이름 아래 밀려오는 서양 문물의 홍수를 맞이합니다. 특히 식문화 부분에서 변화가 컸는데, 거의 1000년 이상 지속되어 왔던 육식 금기가 해제되어 여러 가지 고기 요리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포크나 나이프 같은 생소한 서양식 식사 도구는 물론, 각종 이국적인 식재료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하루빨리 익숙해져 ‘하이칼라’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었죠. 이에 서양에 대한 상식이나 예의범절,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대한 기본적 지식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줄 교양서가 절실하게 필요해졌습니다. ≪식도락≫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등장한 소설이자 식문화 전문 교양서입니다.
≪식도락≫에 소개된 요리는 총 600여 가지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하죠? 여기에는 일식, 양식, 중식은 물론 한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상세한 레시피는 물론, 재료 손질법, 요리 도구, 식사 예절, 영양학까지 소개합니다. 그뿐 아니라 각 화의 뒤에는 작가가 첨부한 각 식품의 영양 성분표며, 요리의 팁도 덧붙어 있으니 요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책 속의 레시피를 시도해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시골뜨기 오하라의 먹방, 똑부러진 오토와의 쿡방 주인공 오하라 미쓰루는 먹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순박하고 성실한 청년입니다. 그의 소원은 요리 잘하는 참한 아가씨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오손도손 사는 것입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여성이 바로 친구 나카가와의 동생 오토와입니다.
오토와는 당시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당차고 똑부러진 신여성입니다. 식문화에 해박한 오빠의 영향으로 혼자 집을 떠나 오사카에서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대학을 졸업한 오빠 친구들에게 위생과 영양에 대해 조언을 할 정도로 박식하기도 합니다.
100년을 앞서 식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다 ≪식도락≫은 단순히 이국적인 식문화의 소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과 내용을 빌려 당시 독자들에게 식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달합니다. 음식이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으며, 음식에 대한 태도를 통해 그 사회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 먹는 음식이 건강한 재료로 만든 것이고 이를 만드는 과정도 위생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단순히 먹거리에만 한정한 의견이 아니라 음식의 재료를 만드는 데 필요한 농업과 공업 기술의 문제이자 그것을 만드는 가정의 주거 구조와 생활 양식의 문제이며,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높은 사회적 인식 수준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유기농 식재료나 유전자 조작 식품 등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주장입니다. 이러한 선구적인 인식을 ≪식도락≫은 이미 100여 년 전에 제시하고 있었으니, 정말 놀라운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식도락 – 봄》 무라이 겐사이 지음, 박진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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