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시리다
이정록은 오롯이 그를 키워낸 고향, 가족,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래서일까? 한 후배 시인은 그의 시에서 곰살가운 살내가 풍긴다고도 했다. 설이 멀지 않았다.
얼음 도마
겨울이 되면, 어른들은/ 얼어 버린 냇물 위에서 돼지를 잡았다.// 우리 동네에는/ 바다까지 이어지는 도마가 있었다./ 얼음 도마는 피를 마시지 않았다./ 얼어붙은 피 거품이 썰매에 으깨어졌다./ 버들강아지는 자꾸 뭐라고 쓰고 싶어서/ 흔들흔들 핏물을 찍어 올렸다./ 얼음 도마 밑에는 물고기들이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노을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핏물은 녹아내려 서녘 하늘이 되었는데/ 비명은 다들 어디로 갔나?)// 얼음 도마 위에 누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돼지가 있었다./ 일생 비명만을 단련시켜 온 목숨이 있었다.// 세상에,/ 산꼭대기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도마가 있었다.
≪이정록 육필시집 가슴이 시리다≫, 46~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