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초판본
윤송아가 엮은 조기천의 <<초판본 백두산>>
기이한 영웅
북한 최초의 서사시. 항일 혁명 문학의 모범. 김일성을 영웅의 전범으로 전하는 고상한 리얼리즘. 삼대가 권력을 독점하는 기이한 나라의 출발점이 이곳에 있었다.
적은 반항도 못하고
죽고 도망치고 —
류치장 지붕에선
삼단 같은 불길이 일어난다,
이곳저곳 관사에서도
왜놈들 집에서도
반역자들 집에서도
불길이 일어난다,
캄캄한 하늘을 산산이 윽물어 찢어
쪼박쪼박 태워 버리며
불길이 일더니
만세 소리 터진다
첨에는 몇 곳에서
다음에는 여기저기서 —
눌리우고 짓밟힌 이 거리에
반항의 함성 뒤울리거니
암담한 이 거리에 투쟁의 불길 세차거니
흰옷 입은 무리 쓸어 나온다…
머리 벗은 로인도 발 벗은 녀인도
벌거숭이 애들도.
절망이 잦아든 이 거리에
별천지의 화원인 양 화해에
불꽃이 나붓기고
재생의 열망을 휘끗어 올리며
화광이 춤추는데
밤바다같이 웅실거리는 군중
높이 올라서 칼 짚고 웨치는
절세의 영웅 김일성 장군!
≪초판본 백두산≫, 조기천 지음, 윤송아 엮음, 77~79쪽
<백두산>은 어떤 작품인가?
북한 최초의 서사시다. 머리시와 본시(本詩) 7장, 그리고 맺음시로 구성된 장편이다. 북한 문학사에서 항일 혁명 문학의 모범으로 추앙받는다.
이 시의 김일성 장군이 그 김일성인가?
그렇다.
그가 이 시의 주인공인가?
그렇다. 이 시는 그가 이끄는 항일 유격대가 활약한 보천보 전투를 보여 준다. 항일 무장 투쟁의 승리와 해방의 의지를 역설한다.
시에서 그는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나?
항일 빨치산의 지도자로서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품성과 지사의 풍모, 무장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지략과 용맹성을 겸비한 영웅의 전형이다.
어떤 얼굴인가?
굶주림에 시달리다 조선 농민의 소를 훔친 빨치산 대원의 행동을 꾸짖으면서 “우리의 근간도 민중 속에,/ 우리의 힘도 민중 속에 있다!”고 부르짖는다. 민족 해방 투쟁이 철저한 민중 중심의 가치관과 상호 신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또 누가 등장하나?
항일 전사들인 철호, 꽃분, 영남이다. 이들이 해방 후 새 조국 건설의 대과업을 이끌어 갈 민중 영웅의 전범이자 혁명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철호’는 정치 공작원으로서 격전지에서 최후까지 맞서다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는 혁명 전사다. ‘꽃분’은 철호의 비밀공작 활동에 적극적으로 조력하면서 연정을 혁명 과업의 수행으로 승화하는 인물이다. ‘영남’은 일본 수비대의 총격으로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싸우라!/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짖는다.
이 시의 정치 전략은 무엇인가?
김일성 유격 부대의 항일 혁명을 건국 사업과 직접 연결한다. 민족 해방의 영웅이 곧 새 나라 건설의 주체임을 말하면서 역사적 필연성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우상화인가?
도식적인 우상화나 생경한 형상화에 기대는 작품만은 아니다.
조기천은 누구인가?
연해주에서 태어난 재소 고려인이다.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전승자이자 북한 문학의 계도자, 그리고 재소 고려인 문학의 형성 동인이다. 1951년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재소 고려인이라는 사실은 이 시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나?
초기 판본에는 “이 시편(詩篇)을 영웅적 해방군 쏘련 군대에게 삼가 올리노라”라는 헌사가 들어 있다. 그 밖에 ‘쏘련 빨찌산’, ‘쏘베트 해방군’ 같은 소련을 찬양하거나 친선을 강조하는 시구가 있다. 그러나 이후 1980년대에 발행한 판본에서는 그것들이 삭제되었다.
소련을 부정한 이유는 뭔가?
1956년 8월 종파사건 및 1967년 전후 주체사상의 확립을 통해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김일성 중심의 주체노선을 강화하는 북한 내의 정치적 방향성이 반영된 결과다.
이 시는 언제 발표되었나?
건국사상 총동원 운동이 펼쳐지던 1947년이다. 그해 2월 당 기관지 ≪로동신문≫에 1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북한 주민들의 사상 개조와 노동력 동원 등을 목적으로 한 대중 문화교양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다.
당시 북한 문학가들은 어떤 작품을 썼나?
당의 문예 정책인 ‘혁명적 낭만주의’, ‘고상한 리얼리즘론’ 같은 창작 방법에 기초해 전위적이고 선동적인 작품 창작을 추동했다. <백두산>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이 시에서 ‘고상한 리얼리즘’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왜적이 짓밟은 이 땅에/ 살아서 살 곳 없고/ 죽어서 누울 곳 없고/ 모두 다 잃고 빼앗”긴 채 “가슴 꺼지는 한숨으로/ 이 강 건너 이방의 거친 땅에/ 거지의 서러운 첫걸음”을 옮기며 디아스포라로서 척박한 삶을 강요당하는 백성들, 그리고 “오뉴월 북어인 양 벌거숭이 애들/ 뼈만 남은 젊은이들/ 꼬부라진 늙은이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전한다.
이 시의 강점은 무엇인가?
풍부한 이야기성과 웅장한 스케일, 장엄한 비장미를 담보하면서 장편 서사시로서 전형성을 획득한다. 또 한국 문학사 안에서 흔치 않은 ‘항일 무장 투쟁’이라는 소재를 ‘백두산’, ‘압록강’ 같은 민족적 표상을 통해 형상화한다.
당신이 고른 판본은 무엇인가?
1973년판이다. 1940~1950년대 판본은 거의 개인 소장본이라 입수가 어려웠다.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 자료에서 빠진 1970년대 판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판본에도 1980년대 판본과 동일한 개작의 형태가 보인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 작품은 어디쯤 있는가?
한국 근대 문학의 리얼리즘 경향을 전승하면서 착취당하는 민중의 삶을 그렸다. 북한 문학의 자장 안에 놓기보다는 남북한 문학사의 전체적인 조망 아래 다각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 분단 후 남북한을 관통하는 문학사의 성과로서 관측하는 것이 유효할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윤송아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