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시집
遊楓嶽和車紫洞
山上有山天出地
水邊流水水中天
蒼茫身在空虛裏
不是烟霞不是仙
풍악에서 놀며 차식에게 화답하다
산 위에 산 있고 하늘이 땅을 내었으며
물가에 물 흐르고 물속엔 하늘이 있는데
아득한 내 몸은 텅 빈 하늘 속에 있으니
노을도 아니거니와 신선도 아니니라
≪봉래시집(蓬萊詩集)≫, 양사언 지음, 홍순석 옮김, 53쪽
시에서 말하는 차식이 누구인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43년, 중종 38년에 문과 급제 뒤 내외 관직을 두루 지냈다. 1575년, 선조 8년에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지내다가 상한(傷寒)으로 사망했다.
양사언과는 어떤 사이였나?
시인과 동갑으로 매우 절친했던 시우다. 시인이 회양부사로 재임할 때 금강산을 함께 유람했다.
이 시에 대한 차식의 대답이 있었나?
양사언은 주에 이렇게 적었다. “동북쪽에서 물이 흘러내림을 형용한 것이다. 차식이 감탄하며 이르기를 ‘이 시는 옛사람들도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달했다’고 했다.”
양사언이 누구인가?
16세기 조선의 문인이자 서예가다.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김구·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일컬어졌다. 봉래는 그의 호다.
호의 사연은 무엇인가?
금강산을 사랑하여 스스로 지어 썼다.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가 완상했다. 만폭동에 그가 새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암각문이 남아 있다.
그가 남긴 시문은?
자연·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작품과 자신의 회포를 노래한 시가 많다. 궁핍한 가운데 안빈낙도의 흥취를 즐겼다. 도가적 흥취에 몰입했다.
도가적 흥취라면?
<구선봉>을 보라. “구선이 언제 높다란 하늘 가운데/ 멀리서 와 놀면서 무지개를 탔었나/ 바다의 좋은 경관 볼 때마다 싫지 않아/ 지금까지 속세 떠나 하늘에 의지해 서 있네”
그에 대해 사람들은 뭐라 했나?
조경(趙絅)이 <묘갈명>에서 “처음에는 이단(異端)을 가까이하더니/ 나중에는 선도(仙道)에 빠졌도다/ 이단과 선도를 하지 않았다면/ 넉넉히 요천에 드실 텐데”라 했다.
이단과 선도라니?
그는 이인(異人)으로 태어나 내외의 방술(方術)에 몰입했고, 유자(儒者)이면서도 불교를 가까이했으며, 만년에는 선도(仙道)에 빠졌다. 남사고(南師古)에게 역술(易術)도 배웠다.
작품에 대한 평은?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양사언을 두고 신선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고, 그 글씨 또한 그 인물과 같은데, 사람들이 그 글씨가 진속(塵俗)을 벗어난 줄은 알아도 그 시가 세상 사람의 말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세속의 태를 벗어난 천진하고도 청아한 시풍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양사언은 어떻게 살다 갔나?
서얼 출신임에도 1546년, 명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부임하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다. 만년에 지릉(智陵) 화재 사건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뒤 풀려나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봉래 시집≫은 그가 남긴 것인가?
아들 만고(萬古)가 집안에 전하는 초고를 바탕으로 수집·편차하여 간행한 것이다.
수집이라니?
수필고본(手筆稿本)으로 전해진 것 외에는 양만고가 산재한 작품을 모았다. 예를 들어 <완산령을 애도함(挽完山令)>은 허봉(許葑)이 암송해 전한 것이고, <거문고 배에 쓰다(題琴腹)>는 강릉 주인집에서 얻은 것이며, <고죽 최경창에게(贈崔孤竹)>는 널리 회자하여 전하던 것이다.
언제 간행되었나?
편찬자의 서(序)와 발(跋)이 없어 편집 및 간행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재 1633년경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이 전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홍순석이다.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2699호 | 2015년 7월 24일 발행
≪봉래시집≫, 양사언의 탈속지경
홍순석이 옮긴 양사언의 ≪봉래시집(蓬萊詩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