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자 천줄읽기
세계문학, 바로크 문학, 스페인 소설 신간 <<비판자 천줄읽기>>
쇼펜하우어가 낙관한 책
우리가 아는 비관론자 가운데 언제나 첫 번째 자리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그랬던 쇼펜하우어가 한 권의 책을 두고 “이 세상에 나온 가장 훌륭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낙관의 비관일까, 비관의 낙관일까? 오늘 우리는 8% 발췌본으로 위대한 스페인의 17세기 사상가 발타사르 그라시안을 직면한다.
어떤 책인가?
쇼펜하우어가 “이 세상에 나온 가장 훌륭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 책이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다.
그가 누구인가?
스페인 바로크 문학을 대표하는 17세기 위대한 작가다.
언제 출간되었나?
저자의 생애 말년인 1651년에 1부, 1653년에 2부, 1657년에 3부가 출판되었다.
특징은?
소설적인 스토리 구성을 자제했다. 등장인물도 두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현실 세계의 인물이 아니다.
등장인물은?
다양한 추상 개념이 의인된다. 예컨대 행운, 호의가 인물로 등장하고 신화, 전설 속 인물이 나타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가 독자를 사로잡는가?
그런 소설이 아니다. ‘소설적’ 재미가 아니라 삶의 전반을 관조하는 작가의 성찰이 나타난다. 독자는 전광석화처럼 날카롭게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의 예리함과 거침없이 그 진실을 설파하는 언어의 통렬함을 만난다.
철학 소설인가?
타당하다. 수상록 또는 교훈서로도 분류할 수 있다.
구조는?
1부 13장, 2부 13장, 3부 12장으로 균형을 이룬다. 1, 2, 3부의 출간 시점이 각각 다르지만 내용의 연속성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인가?
안드레니오와 크리틸로가 세상을 여행하면서 겪는 체험과 의견을 기술했다. 1부는 유년과 젊은 시절, 2부는 중·장년 시절, 3부는 노년 시절의 여정을 비유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어떤 곳인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이다. “미덕은 박해를 받고, 악덕은 박수를 받소. 진실은 침묵하고, 거짓이 활개를” 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적나라한 풍경이다.
왜 부정적인가?
그라시안이 살았던 바로크 시대의 전형적인 세계관이다. 당대 스페인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기도 하다.
시대가 불행했는가?
앞선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의 오랜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현세 인간의 삶을 긍정했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는 생명의 제반 현상들이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미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와 불안이 지배한다.
스페인의 특수성은?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팽창했던 국운이 급격하게 쇠락하고 민중의 삶이 지극한 궁핍에 빠진다. 비관적인 분위기가 한층 뚜렷해진다. 이 나타나게 된다.
당대 스페인 문학에서 그라시안의 좌표는?
이 시기 많은 작품들이 스페인 사회의 어두운 구석들을 현장감 있게 묘사하면서 조국의 아픈 현실을 조망한다. 그러나 그라시안이 제시하는 생의 모순들은 훨씬 더 뿌리가 깊고 근원적이다.
뿌리 깊은 생의 모순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해답을 찾기 어려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들이다.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가 이 땅을 조화로운 곳으로 만들고자 했어도, 이곳에 사는 인간들은 세상을 부조리로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삼백여 년의 시차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하는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을 현실의 패배자의 냉소 정도로 폄하하는 이들에게 “왜 이 작품이 시공을 초월해 바로크 문학의 걸작, 아니 전체 스페인 문학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떻게 발췌했나?
원전의 약 8퍼센트 분량을 번역했다. 1부는 인간의 사랑과 열정, 그에 따르는 실망 혹은 기만이 배경을 이룬다. 2부에서 5장과 6장을 골랐는데 인간의 행복을 서술한다. 3부에서 선택한 11장은 죽음을 성찰한다.
만연체 문장을 어떻게 옮겼는가?
복합문을 단문으로 나누어 번역하면 의미도 명료해지고 가독성도 높아진다. 그러나 원전의 문체는 손상된다. 원전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살린 채 우리말로 옮기면 우리말 언어 체계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상당히 읽기 어렵다. 원전의 문장 구조를 존중해 대체로 후자를 선택했다. 최선이었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인상적인 한 대목을 추천한다면?
미덕은 박해를 받고, 악덕은 박수를 받소. 진실은 침묵하고, 거짓은 활개를 치오. 박식한 자는 책이 없고 무식한 자는 서점들을 통째로 가지고 있소. 책 속에는 현자가 없고, 현자는 책을 내지 않소. 가난한 자의 신중함은 어리석음이 되고 힘 있는 자의 어리석음은 떠받들어지오. 생명을 살려야 할 사람들은 죽음을 주오. 젊은이들은 시들어 가고 늙은이들은 욕정을 되살리오. 법률은 한쪽 눈이 먼 애꾸요.
발타사르 그라시안 지음, 남영우 옮김, ≪비판자≫, 51쪽
추천 사유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질서보다는 혼돈, 정의보다는 불의, 기쁨보다는 슬픔과 비탄이라는 것이 작가의 관점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남영우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몇몇 대학에서 강의한다.
왜 이 책을 골랐나?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격언집 한 권이 1990년대에 경이로운 판매 부수를 기록하면서 국내에서 히트했다. 한동안 유사한 서적의 출판 붐을 일으켰다. 그 책은 그라시안을 경외하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독일어 번역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의 작품이 스페인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되지 않았던 사실이 늘 아쉬웠다. 이번에 그의 대표작을 소개할 기회가 주어져서 기쁜 마음으로 번역 작업에 임했다.
발렌틴 카르데레라(Valentín Carderera,1796~1880)가 그린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초상화(1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