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후안 데 라 크루스 시집
2375호 | 2014년 12월 25일 발행
완성의 가장 높은 상태
성탄절 특집 4. 최낙원이 옮긴 ≪산 후안 데 라 크루스 시집(Poesías completas de San Juan de la Cruz)≫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고 손이 목을 건드리자 순간, 나의 모든 감각은 정지해 버렸다.
움직일 수 없었고 기억도 사라졌다.
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영적 부인(否認)을 통해 하느님과의 합일, 즉 완성의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한 것을 즐거워하는 영혼의 노래
캄캄한 어두운 밤
강렬한 욕망으로 사랑의 불길에 사로잡혀
오, 달콤한 하느님의 은혜여!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조용히 잠든 집을 빠져나왔다네.
어둡고 깊은 밤에
비밀스러운 통로를 통해, 몸을 감춘 채,
오, 달콤한 하느님의 은혜여!
칠흑 같은 밤, 아주 몰래 빠져나왔네.
아직 나의 집은 적막 속에 빠져 있고.
달콤한 밤에,
비밀리에,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고,
나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
그 어느 빛도 날 인도함 없이
오직 내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그 빛에 이끌려.
그 빛은 정오의 햇빛보다
더욱 분명하게 나를 인도했다네.
내가 아주 잘 아는
그분이 기다리는 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오, 나를 인도했던 밤이여
오, 새벽보다 더욱 친절한 밤이여,
오, 사랑하는 두 연인을
하나로 만들었던 밤이여,
여인은 이제 사랑하는 자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네!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만 준비된
나의 가슴에 꽃이 가득 피었네.
거기서 그는 잠이 들었고,
나는 그에게 선물을 주었지.
그리고 삼나무 부채로 시원한 바람을 보내 주었지.
성벽 총안(銃眼)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자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네.
그의 부드러운 손이
나의 목을 건드리자
순간, 나의 모든 감각이 정지해 버렸다네.
움직일 수가 없었고 기억 또한 사라져 버렸어.
얼굴을 임에게 기대었네.
모든 것이 정지했고, 나도 멈추었네.
나의 근심, 완전히 잊힌 채,
백합 사이로 묻혀 버렸네.
≪산 후안 데 라 크루스 시집≫, 최낙원 옮김, 18~20쪽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종교시다. 산 후안은 세속적인 사랑시처럼 보이는 종교시를 많이 썼다. 성서의 <아가서>에서 모티프를 딴 것이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사랑 노래로 신과 영혼 사이의 관계를 표현했다.
잠든 집을 빠져나온 이유는?
신을 찾기 위해서다.
어두운 밤이란?
철저한 ‘자기 부정’이다. 피조물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정화된다.
어두운 밤이 달콤하고 친절한 이유는 뭔가?
이 밤이 ‘사랑하는 두 연인을 하나로 만들’기 때문이다. 밤을 지나야 아침이 오듯이 신의 영원한 영광의 빛에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혹독한 시험을 거쳐야만 한다.
혹독한 시험의 의미가 뭔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부정’의 화신인 십자가의 고난이 없다면 구원과 부활의 기쁨이 있을 수 없듯이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의 한 표현인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한다.
영혼은 시험을 이겨 낼 힘을 어디서 얻는가?
“오직 내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그 빛에 이끌려”서다.
그 빛이란?
신의 은총인 사랑의 빛이다. 이 빛은 영혼의 마음에서 타오른다. ‘정오의 햇빛보다 더욱 분명’한 이 빛에 이끌려 영혼은 결국 신을 만나게 된다.
신을 만나면 영혼은 어떻게 되나?
“모든 감각이 정지해 버”린다. 움직일 수도 없고 기억도 사라진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합일의 엑스터시다. 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린 안식에서 오는 평강이 그를 완전히 채운다. 영혼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 신의 은혜는 마치 백합 향기처럼 은은하다.
산 후안 데 라 크루스는 누구인가?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시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으로 더 잘 알려졌다. 본명은 후안 데 예페스 알바레스다. 1542년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며 가르멜 수도회 개혁에 헌신하다 1591년 사망했다.
그의 신앙은 어떤 것인가?
신의 은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영적 빈곤 상태, ‘영혼의 밤’이 필요하다. 인용시처럼 ‘영혼의 밤’을 겪는 영혼은 절대적 고독감과 자기 포기 그리고 처절한 시험을 경험한다. 이것을 이긴 후에 신의 은혜의 빛이 그를 감싼다. 영혼이 먼저 자기 포기를 한 다음 신이 은혜를 채워 주심을 경험한다는 영적 원리다.
그는 왜 시를 썼나?
신과의 내밀한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가장 효과적인 이유가 뭔가?
“사랑하는 영혼들이 이해하고, 느끼고, 소원하도록 성령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말 못할 그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는 흔치 않다. 이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특수 언어인 시가 필요하다. 시어를 통해 영혼은 그가 느끼는 신비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느님의 신비와 비밀에 속한 것들이 제공하는 영적 풍성함도 맛볼 수 있다. 시가 지니는 함축성과 리듬은 신의 신비한 메시지를 전하기에 충분하다.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한다.
그의 시의 뿌리는 무엇인가?
스페인 전통 교양시인 칸시오네로, 가르실라소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풍의 스페인 르네상스 시, 그리고 성서다.
세속시들 아닌가?
그는 세속시 형식을 즐겨 사용했다. 당시 스페인 교양시를 지배하던 이탈리아풍 시, 그중에서도 특히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의 시에 매혹되었다. 이를 독특한 상징 기법으로 종교적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신비주의 시학을 표현했다.
어떤 작품을 썼나?
산문 몇 편과 시 몇 수가 전부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글 하나하나에 신을 향한 그의 사랑과 소명에 대한 확신, 사색과 성찰의 열매들이 가득 담겨 있다.
산문은 어떤 내용인가?
시의 해설이다. 그의 시는 고도의 함축적 의미를 담은 상징들을 사용해 신비주의 신학을 표현했다. 산문 해설을 통해 이러한 상징을 교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어떤 작품을 실었나?
산문을 제외한 그의 시 전부를 옮겼다. 놀라운 상징을 통해 독자를 심오한 신비주의로 이끄는, 문학성과 영성이 뛰어난 수준 높은 종교시들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낙원이다. 전북대 스페인중남미어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