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잡기 천줄읽기
중국고전 신간 << 서경잡기(西京雜記) 천줄읽기>>
기원전 한나라 이야기, 백주 참살극
<<서경잡기>>는 기원전 중국 한나라의 일면이다. 오래 된 이야기지만 사실에 상상을 얹어 싱싱한 인간사를 전달한다. 황제와 후궁, 후궁과 화가, 화가와 황제가 얽힌 짧은 이야기 한 토막에서도 본능과 권력과 돈과 운명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원제는 후궁이 너무 많아 모두 볼 수 없었다. 화공에게 후궁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 보고 불러들여 총애했다. 궁인들이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많이 준 자는 10만, 적게 준 자도 5만을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왕장만은 그러지 않았다. 하여 황제를 볼 수 없었다. 흉노가 입조해 미인을 구해 왕비로 삼고자 했다. 황제는 초상화를 보고 그녀를 보내라 했다. 떠나게 되어 불러 보았더니 용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었고 응대도 뛰어났으며 행동거지도 우아하고 고상했다. 황제는 후회했지만 명단이 이미 결정된 뒤였다. 외국에 대한 신의를 중시했기 때문에 사람을 바꾸지 못했다. 그 일을 철저히 조사하여 화공을 모두 저잣거리에서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하니 그 액수가 엄청났다. 화공 가운데 두릉 사람 모연수가 있었다. 사람을 그릴 때 미추와 노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핍진하게 그려 냈다. 안릉 사람 진창과 신풍 사람 유백·공관은 소나 말, 나는 새의 갖가지 자태를 뛰어나게 그렸지만 사람의 미추를 그려 내는 데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하두 사람 양망 역시 잘 그렸는데 특히 배색에 뛰어났다. 번육도 그랬다. 이들은 모두 같은 날 저잣거리에서 죽었다. 도성에 화공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어떤 대목인가?
이 책에 등장하는 한 대목, 곧 ‘저잣거리에서 화공을 처형하다’는 이야기다.
전후 사정이 어찌된 것인가?
이 고사는 ≪한서≫ 권94 <흉노전(凶奴傳)>과 ≪후한서≫ 권89 <남흉노전(南凶奴傳)>에도 기록되었다. 거기서는 왕정, 곧 왕소군이 뇌물을 주지 않아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내용은 없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경잡기≫는 허구를 더해 역사 기록을 소설로 발전시킨다.
소설이라면 인물의 묘사가 관건일 텐데?
강직한 성품의 왕소군과 비리로 사욕을 채운 화공, 음탕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황제를 캐릭터 수준으로 형상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고사는 이후 시·사·소설·희곡 등 중국 문학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경잡기≫는 어떤 책인가?
일정한 주제 없이 쓴 132조의 고사를 담은 중국 고대 필기 문헌이다.
이 책의 발췌 기준은?
총 132조 중에서 한 두 줄로 이루어진 극히 짧은 고사 등 32조를 제외하고 100조를 뽑았다. 주요한 고사는 모두 수록했다고 보면 된다.
서경이 어디인가?
서한 또는 전한의 수도 장안을 말한다. 지금의 산시성 시안이다. 동한 또는 후한의 수도 낙양을 ‘동경’이라 부른 데 대비한 이름이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궁정 건축물과 궁중 생활 기록이 가장 많다. 전성기를 누렸던 서한은 궁정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축조했다. 여러 고사에서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궁중 생활을 반영한 고사에서는 주로 통치자들의 사치스럽고 음탕한 면모를 묘사한다. 문인과 작품에 관한 일화도 많다. 문인들의 학술 전승, 학문 태도, 창작 활동, 교유 행적 등이 매우 폭넓게 기술되어 있다.
문화와 예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악 제도와 정치 제도를 보여 주는 고사가 있다. 종묘 제사의 의례, 제왕 장례 시의 염복, 황제의 대가(大駕) 행렬, 황태자 속관(屬官)의 칭호에 대한 기록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고사들은 한대의 제도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가치가 높다.
풍속에 대한 기록은 없는가?
7월 7일 칠석날, 9월 9일 중양절, 3월 상사일에 행하는 여러 가지 세시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유행했던 각종 오락 활동과, 사냥을 즐기고 개와 말을 키우길 좋아했던 풍속도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흥미로운 고사는 어떤 것인가?
수는 많지 않지만 신비한 색채를 띤 지괴적 고사가 있다.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다.
역사서인가 문학서인가?
역대 역사서의 저록을 보면 대부분 사부(史部)에 넣었다. 갈홍이 쓴 발문에서도 “≪한서≫의 빠진 바를 보충하고자 한다”라고 쓰여 있듯이 사료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사기≫와 ≪한서≫를 이 책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책에 수록된 한대 사료는 ≪사기≫와 ≪한서≫ 같은 정사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 예를 들어 유방이 도역수들을 여산으로 압송할 때 벌어진 사건, 대장군 위청이 아들 이름을 지어 주었다가 개명한 과정이 그렇다.
정사 기록과 비교해 우리가 얻게 되는 소득은?
서한의 역사를 확인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된다. 특히 <화공을 저잣거리에서 처형하다(畫工棄市)> 고사는 종래로 설이 분분한 왕소군이 나라를 떠난 원인에 대해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고고학 문물 연구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는 평가는?
유력한 증거를 제공한다. ‘교룡옥갑(蛟龍玉匣)’에 대한 기록은 1968년 허베이성 만청현의 한나라 중산왕 유승 부부의 묘에서 출토된 ‘금루옥의(金縷玉衣)’와 일치한다. 또한 ‘피중향로(被中香鑪)’에 대한 기록은 1963년 산시성 시안시 요장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의 향로 ‘와욕향로(臥褥香爐)’와 그 구조가 완전히 일치한다.
문학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위진남북조 지인소설과 지괴소설은 물론이고 멀리 명청대 소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대 부(賦)의 대가인 사마상여·양웅 등의 작부 능력과 창작 과정 및 작품에 얽힌 일화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한대 문인들의 문학적 견해를 엿볼 수 있으며 문학 사료도 비교적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일부 고사는 후대 여러 문인들이 제재와 전고로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중국 문학의 여러 제재의 근원 가운데 하나를 밝히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영향을 받은 시인이나 작품은 어떤 것인가?
이백과 두보를 비롯하여 백거이·왕안석·구양수·소식·육유·원매 등 저명한 시인과 사인이 모두 이 책의 고사를 제재와 전고로 삼아 창작했다. 위진남북조 지인소설에 직접 영향을 끼쳐 ≪어림≫, ≪세설신어≫, ≪소설≫ 등에 그 고사가 채록되어 있다. 또한 수록된 지괴적인 고사는 ≪박물지≫, ≪속박물지≫, ≪수신기≫, ≪술이기≫ 등에 채록되어 있다.
저자는 확실한가?
종래로 설이 분분해 아직까지 정론이 없는 상태다. 대체로 유흠이 짓고 갈홍이 모은 것으로 판단된다.
유흠은 누구인가?
서한의 문학가이자 목록학자다. 자는 자준(子駿)이며 유향(劉向)의 아들이다. 하평(河平) 4년, 즉 기원전 26년에 부친과 함께 비서(秘書)를 교정하라는 명을 받고, 육경(六經)·전기(傳記)·제자(諸子)·시부(詩賦)·술수(術數)·방기(方技) 등의 서적을 모두 연구했다.
갈홍은 누구인가?
동진의 문학가이자 도교 이론가, 의학가, 연금술사다. 자는 치천(稚川)이고 자호는 포박자(抱朴子)다. ≪신선전≫, ≪포박자≫, ≪금궤약방≫ 등을 지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장환이다.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다.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