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규 동화선집
서석규가 짓고 노경수가 해설한 ≪서석규 동화선집≫
자동차와 진달래
장난감은 현혹한다. 나는 옷이 되고 차가 되고 집이 된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면 영혼에선 모락모락 김이 난다. 진달래가 없었다면, 동심으로 보지 못했다면 나는 죽었다.
문득 이층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 자동차를 갖고 싶은 마음이 왈칵 솟아올랐습니다. 빨간 빛에 바퀴가 네 개 달린 그놈의 자동차만 갖는다면 동네에 가서 얼마나 멋지게 뻐길 수 있을 것인가….
순식이가 호루라기 한 개쯤 가지고 온통 마을을 쓸며 자랑을 하지만, 자동차를 가지고 가서 “뿅 뿅−” 하며 끌고 다닌다면 모두 야코가 폭 죽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기어이 한 번 더 할머니를 졸라 보자고 마음먹은 철이는 그길로 곧 장거리로 달렸습니다.
할머니께선 분명 이층집 상점 마루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정 자동차를 못 사 줄 바엔 공이나 호루라기라도 사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층집 앞까지 뛰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달려가 보니, 할머니는 그곳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잡화점 거리로, 생선전 앞으로, 포목전께로 한 바퀴 돌아 봤으나 할머니는 아무 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젠 눈물이 흘렀습니다.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씻으며 다시 쇠전 있는 곳까지 가 보았으나 그것도 헛수고였습니다.
≪서석규 동화선집≫, <장날>, 서석규 지음, 노경수 해설, 6∼7쪽
철이는 할머니를 잃게 되는가?
할머니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누 사는 것을 잊은 할머니는 길가 어느 집 마루에 보퉁이를 내려놓고 장으로 돌아가며 철이에게 기다리라고 당부한다. 철이는 조바심에 할머니를 찾아 나선다. 헛수고만 하고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다 수리고개 날등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를 본다. 마음을 홀딱 빼앗겨 나비처럼 꽃포기를 쫓아다닌다. 헐레벌떡 달려오던 할머니는 꽃에 정신 팔린 철이를 발견한다. 가쁜 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이 작품에 대한 당신의 애착은 무엇인가?
노경수는 “장날 장난감 가게에 진열된 상품에 현혹된 철이가 할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징징거리다가 봄빛에 피어난 진달래꽃이 피워낸 동심으로 욕망을 이겨 내는 이야기”라 했다. 그 동심이 나의 애착이다.
동심이 동화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가장 필요한 것이 가장 기본이다. 나도 그렇다. 평론가는 내 동화의 등장인물들이 사랑하며 갈등하다가 동심을 찾아간다고 했다. 독자들도 그러길 바란다.
이 책에 두 편의 환상동화가 실렸다. 어떤 이야기인가?
<박쥐굴의 화성인>은 화성인의 도움으로 로켓을 발사하는 이야기다. <끝섬에 나타난 김 박사>는 바닷속을 개척해 농장을 만드는 이야기다.
언제부터 과학공상물을 썼는가?
1960년에 발표했다. 사이언스 픽션은 생소한 장르였다. 노경수는 “당시 아동문학의 미개척 분야였던 과학의 세계를 환상동화로 다뤘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했는데 사실 그랬던 것 같다.
과학과 당신은 어떤 관계인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1950년대 말에 신문사에는 과학부가 없었다. 그때 과학 기사를 개척하여 썼는데 사이언스 픽션 동화도 그때 썼다.
당신의 대표작은 무엇인가?
평론가는 <한티골 토끼 동산>을 비롯해 <날아라 꾸꾸야>, <금붕어와 가재>, <백조> 등의 생태 동화를 꼽았다.
생태 동화에서 당신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의 다양성, 자연과 인간의 상생이다. 가령 <금붕어와 가재>에서 한 어항 속에 사는 금붕어와 가재는 친해지고 싶지만 친해질 수 없다. 한쪽은 낮에 한쪽은 밤에 활동하는 탓이다. 주인공들의 삶을 생태적으로 접근해 서로 다름을 이야기한다.
당신이 꼽는 당신의 대표작은 무엇인가?
평론가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렇지만 나는 <달처럼 별처럼>도 꼽고 싶다. 마음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달처럼 별처럼>은 무슨 이야기인가?
오랑캐가 쳐들어와 나라 안이 온통 어수선할 때다. 다리골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란을 간다. 복룡이 할아버지만 요지부동이다. 온 가족이 불안에 떤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데 의견을 모은 뒤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굴비 엮듯 엮는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집 안만 뱅뱅 돌다 모두가 기진맥진했을 때 피란을 왔다며 주저앉는다. 그렇게 눈 속에 파묻힌 마을에서 온전히 살아남은 집은 복룡이네뿐이다. 피란을 떠난 사람들은 눈 속에서 길을 잃고 얼어 죽었다.
그 작품이 당신의 마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전통 문화와 정서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애정이 늘 내 마음 바닥에 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일제 강점기였는데 어떻게 민족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나?
어느 날 ≪소국민(少國民)≫이라는 소학생 신문에 근엄한 얼굴들이 실렸다. 오려서 책상 위에 놓았다. 일본 관리들 사진이었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가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우리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 한글은 어머니가 이웃 아주머니들에게 가르칠 때 어깨너머로 배웠다. 고향 마을은 내게 전통을 존중하는 삶의 기본을 가르쳐 주었다.
당신이 국내 최초 일간 어린이 신문을 만들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1958년 연합신문사 문화부에 있었다. 피폐했던 사회가 조금씩 안정을 찾으면서 신문 지면이 계속 늘어났다. 신문사마다 새로운 지면 편성을 위해 머리를 짜낼 때였다. 나는 조간 한 면을 ‘어린이 신문’으로 내자고 했다. 그렇게 ≪어린이 연합≫이라는 머리띠를 두른 국내 최초 ‘일간 어린이 신문’이 나왔다.
강소천과의 인연이 남다른 연유는 무엇인가?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당시 심사위원이 강소천 선생이었다.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종로 ‘새벗사’로 찾아가 뵈었다. 1956년 서울에 와서 잡지 ≪여성계≫ 편집 일을 맡았다. 내겐 무척 생소한 일이었다. 3개월을 하루가 멀다 하고 선생에게 찾아가 일을 배웠다. 또 1960년 선생이 ‘한국아동문학연구회’를 발족할 때 발로 뛰며 도왔다.
당신은 누구인가?
서석규다. 동화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