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나 동화선집
1990년대 한국동화 특선, 선안나의 <꽃담>
아버지는 반푼이에 동네 머슴이었거든요.
오줌장군을 지고 동네 변소를 펐습니다. 꼬마들은 아버지를 ‘똥 장군’이라 불렀습니다. 세월은 가고 소년도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꽃담을 손보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장군 장군 이 장군. 별도 없는 똥 장군. 아버지는 정말 장군이었습니다. 선안나의 동화는 맑고 뜨겁게 나의 뿌리를 찾아갑니다.
그 마을은 나지막한 산자락에 있었습니다. 푸른 산 빛에 싸인 그 마을이, 아이는 어쩐지 포근하고 정답게 느껴졌습니다. 그건, 아이가 도시에서만 살아온 때문인지 모릅니다.
“어떠냐. 좋은 곳이지?”
아빠 목소리가 떨려 나옵니다.
아이는 아빠 얼굴을 살며시 훔쳐봅니다.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아무튼 뭔가 벅찬 느낌이 아빠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오래오래 마을을 바라보며 서 있는 아빠의 손을, 아이가 살며시 잡습니다.
“아빠.”
“왜?”
“아빤 이 마을에 와 본 적이 있어요?”
“그래.”
“언제요?”
“옛날… 아주 옛날에.”
아이는 물어보고픈 말이 아직 많은데, 아빠는 성큼성큼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아이도 종종걸음을 쳐야 했습니다.
아빠가 걸음을 멈춘 곳은 마을에서 조금 비껴 난 산기슭입니다.
거기, 오래된 집 한 채가 있습니다.
썩어 내려앉은 초가지붕 위에 잡초가 하늘거리고, 허물어진 흙담 위로 질경이가 퍼렇게 돋아 있습니다.
“아빠, 꼭 도깨비가 나올 것 같아요.”
아이가 짐짓 어깨를 움츠리는 시늉을 합니다.
그러나 아빠는 대꾸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존재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얼굴입니다. 그런 아빠를, 아이는 어쩐지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심코 두리번거리던 아이의 눈길이 담장에 가 멎습니다. 흙벽에다 조약돌로 예쁜 꽃무늬를 새긴 꽃담입니다.
“아빠, 이 집에 살던 사람은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었나 봐요.”
“그걸 어떻게 알지?”
“이렇게 예쁜 담장을 만들었잖아요.”
아빠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흙담만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한참 뒤 아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 집에 살던 사람은 정말로 착한 사람이었지.”
“아빠는 그 사람을 알아요?”
“알고말고. 바로 네 할아버지신걸.”
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놀리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빠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그럼 아빠도 여기서 살았어요?”
“그랬지.”
“그런데 아빠 고향이 시골이란 말은 한 번도 안 했잖아요.”
“너만 했을 때 이곳을 아주 떠났으니까. 그러곤 여태 잊고 살았지.”
그렇게 얼버무렸으나, 사실 아빠는 한순간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그리운 곳이면서도 한사코 잊어버리고 싶은 곳이기도 함을, 아이에게 어찌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
소년의 아버지는 동네 머슴이었습니다. 오줌장군을 지고 다니며 동네의 변소를 도맡아서 푸는 아버지의 뒤에는 동네 꼬마들이 졸래졸래 따라다녔습니다.
장군 장군 이 장군.
별도 없는 똥 장군.
꼬마들이 합창을 해도, 약간 모자란 아버지는 화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꼬마들을 돌아보며 히죽 웃으면 그뿐이었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1등을 해도, 소년에게는 동네 머슴의 아들, 반푼이의 아들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마을을 떠나자고, 멀리 아는 사람 없는 도시에 가서 살자고 소년은 날마다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세상 무엇보다도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소년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 갈 날을 앞두고 아버지는 금이 간 담장을 손보았습니다. 여느 때보다도 더욱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꽃무늬를 만들었습니다.
“며칠 뒤에 떠날 텐데 담은 뭐하러 고쳐요?”
소년의 말에, 아버지는 어눌하게 대꾸했습니다.
“혹시 아남? 누가 와서 살는지.”
그때의 슬퍼 보이던 아버지 얼굴을,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빠, 어렸을 때 얘기 좀 해 주세요.”
아이의 목소리에, 아빠는 퍼뜩 정신을 차립니다.
“그러마. 아빤 말이다, 아주 어렸을 땐 우리 어머니가 선녀인 줄 알았단다.”
“왜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거든. 느이 엄니는 선녀였어. 너 하나 남기구서 도로 하늘 나라로 돌아간 겨, 하고.”
“….”
“물론 너희 할머니가 선녀일 리는 없지. 그러나 할아버지께서 거짓말을 하신 건 아니란다.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는 할머니는 그만큼 소중한 분이셨던 거야.”
“으응.”
아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그동안 아빠의 마음속에만 꼭꼭 싸 두었던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한 번 바깥으로 내놓자, 잊고 있었던 기억들까지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실꾸리가 풀리듯, 아빠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말이다, 손재주가 아주 뛰어난 분이셨단다. 팽이고, 썰매고, 방패연이고, 동네에 나만큼 좋은 것을 가진 애는 없었어….”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이는 아이에게서, 아빠는 30년 전의 자기 모습을 봅니다.
또, 자신 속에 살아 있는 아버지를 느낍니다. 고향에 돌아옴으로써 비로소 평화를 되찾은 아버지의 영혼을.
도란도란 이야기에 빠져 있는 부자의 어깨 위로, 산 그리메가 곱게 내립니다.
<꽃담> 전문, ≪선안나 동화선집≫, 선안나 지음, 이은주 해설, 93~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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